1965년 4월 정부 기관 연구기관장 리셉션장. “우리 기업이 스웨터를 만들어 2000만 달러나 수출했다”며 대견해하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안색이 갑자기 나빠졌다. 최형섭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이 “일본은 이미 매년 10억 달러어치의 전자제품을 수출하고 있다”고 말한 직후였다.
박 전 대통령은 한국의 산업발전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영향력이 절실함을 깨달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세우고 대덕연구단지를 건립하게 된 계기였다. 대덕연구단지가 초창기에 조성될 당시 배경은 ‘중화학공업 육성’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이른바 ‘중화학공업 선언’을 했다. ‘1980년대 초 100억 달러 수출, 전체 수출 상품 중 중화학 제품 50% 이상 차지’가 핵심 목표였다.
김광모 당시 대통령 비서관(80)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끝난 1971년 무렵 2차산업 비중이 1차산업에 근접한 공업국가로 변모했어요. 과학기술의 산업 지원은 종합연구소인 KIST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분야별 전문 연구소들이 필요했는데 홍릉은 이미 포화상태였고….”
그 대안이었던 대덕군 유성읍과 탄동면, 구즉면 일대 26.7km²(약 834만 평)는 경부·호남 철도와 고속도로가 지나는 국토의 중심이었다. 과학기술 성과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지역으로 제격이었다. 금강과 대청댐이 있어 용수에 문제가 없고 유성 온천과 계룡산이 있어 거주 환경도 좋았다.
○ 청와대 직접 지휘로 급진전… 권력 바뀌며 부침도
청와대는 1976년 4월 대덕연구단지 건설 직접 지휘에 나섰다. 오원철 당시 청와대 경제2 수석비서관(85)은 “대통령이 연구단지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가 과기처가 진척을 많이 못 시킨 데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고 보고하자 화를 내며 ‘오 수석 당신이 하시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대덕단지 건설을 주도하면서 사업이 속도를 냈다. 1978년 3월 황량하던 연구단지에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 처음 입주한 뒤 다른 연구단지들이 속속 자리를 잡았다. 표준연구원 관계자는 “마치 운동장에서 ‘기준’을 중심으로 대오를 갖추듯 과학과 산업, 생활의 ‘표준의 표준’을 잡아주는 표준연구원을 중심으로 연구소들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고 전했다.
대덕밸리(2000년), 대덕연구개발특구(2005년)로 명칭을 바꾼 대덕연구단지에는 2011년 말 현재 정부출연연구기관 30개, 공공기관(투자기관) 11개, 국공립기관 14개, 비영리기관 33개, 교육기관 5개, 기업 1306개 등 모두 1399개의 기관이 들어섰다.
정부 출연 연구소의 설립자는 모두 ‘박정희’였다. 박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의지를 가진 지도자가 되길 원했다. 절대 권력자가 설립자여서 각계의 관심과 지원을 끌어내는 데 도움도 됐다.
KAIST 문만용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이 KIST와의 연구 계약을 독려하자 일부 기업이 ‘대통령 뜻에 호응한다’며 마치 정치자금처럼 과제를 지정도 하지 않고 연구비를 청와대에 맡긴 사례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권력의 이동에 따라 희비는 엇갈렸다. 대덕연구단지 설립자인 박 전 대통령이 1979년 서거하자 연구단지는 된서리를 맞았다. 신군부는 국방과학연구소를 폐쇄하려 했다. 1980년대 말 16개 연구소를 8개 대단위 연구소로 통폐합했다. 이후 정권들의 관심도 멀어져 1981년으로 예정됐던 연구단지 ‘조성완료’는 1992년에서야 완공됐다. 40년이 지난 지금,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 기념물을 간직해온 4개 연구소들이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할 11월 말 연구단지 40주년 기념식장의 1차 후보지로 물망에 올라 있다.
○ 청계천을 누빈 해외 유치 과학자
대덕연구단지 성공 비결의 핵심은 해외 우수인재 영입이었다. 연구단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연구단지를 어떻게 최고의 두뇌로 채울까’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정부는 ‘한국인 해외과학자 유치’에서 해답을 찾았다. 열악한 국내 연구환경 때문에 유학 후 귀국하지 않는 우수 과학자들이 대상이었다. 1962∼72년 당시 미국 유학생 중 한국인의 미(未)귀국률은 62.62%로 조사대상 25개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한 원로 과학자는 “저작권 개념이 없던 당시 우수 과학자를 1명 유치하면 그의 연구 성과는 물론 선진 연구시스템을 통째로 가져오는 것을 의미했다”고 말했다. 해외 과학자 유치는 국가적인 난제로 떠오른 우수 두뇌 해외 유출 문제도 해결하는 일석이조였다.
정부는 한국에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 보험회사와 계약해 제공하고 보수를 해외 현지의 4분의 1 수준이지만 국내 국립대 정교수의 2∼3배(월 6만∼9만 원)를 주는 파격 조건을 제시했다. 보수가 너무 높다는 국립대 교수들의 반발을 전해들은 박 전 대통령은 예상봉급표를 확인한 뒤 “나(7만8000원)보다 봉급이 많은 사람들이 수두룩하군. 이대로 시행하시오”라고 했다. 그는 연구환경의 안정성이 보장될지, 가난하고 권위적인 한국 사회에 적응할지 불안해하던 유치 대상 과학자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친서를 보내 귀국을 독려했다.
미국 아이오와대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지내다 1979년 귀국해 핵연료개발공단에 근무한 장인순 전 원자력연구원장(73·무기화학 전공)은 “근무환경은 열악했지만 조국의 과학과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긍지로 주당 80시간 이상 일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들려준 ‘청계천 일화’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연구소는 장비가 거의 갖춰져 있지 않았어요. 장비와 부품을 다른 연구소에서 빌려 쓰다가 서울 청계천으로 눈을 돌렸죠. ‘청계천에서는 비행기나 탱크 조립도 가능하다’는 말 그대로 당시 공구상가가 밀집해 있던 청계천에는 연구를 위한 재료가 많았죠. 그래서 청계천 복원이 진행되던 2005년경 개인적으로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전 대통령)에게 청계천에 ‘조국 근대화 공헌탑’을 세우자고 제안하기도 했죠. 비록 서울시가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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