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1979년은 격동의 70년대를 마감하는 해이기도 하면서 한국사의 중요한 대전환점이 되는 해이다. 집권층에 대한 민심의 불신은 이미 그 전해 말 총선에서도 드러났지만 유신 정권은 이를 정치적 위기로 받아들이기에 너무 경직됐고 오만했다. 하지만 여당인 공화당 안에서조차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경고들이 공개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78년 국회의원 총선거로 국회에 재등원하게 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회고록 ‘나의 정치인생 반세기’에서 “헌정 사상 처음이었던 78년 말 공화당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며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부는 결정적 실책을 범했다. 안정적인 세원 확보를 명분으로 갑자기 부가가치세를 도입하기로 하고 증권거래에 대해서도 거래세를 매기기로 한 것이다. 국민들의 거부감은 대단했다. 부가세에 대한 인식과 홍보가 부족해 세무서 직원들조차 빗발치는 납세자들 문의에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답할 정도였다. 물가도 30% 이상 뛰어버렸다. 증권시장도 거래세가 신설되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말았다. 증세(增稅) 조치들은 그렇잖아도 바닥까지 인기가 떨어진 공화당이 자기 발등을 도끼로 찍은 격이 되었다…(나는) 79년 3월 10대 국회가 공식 출범했는데도 신명이 나질 않았다. 오랜만에 국회에 들어갔는데도 정권은 동맥경화증에 걸려 우울하기만 했다. 당시 여당은 (78년 10월 총선에서) 야당에 득표율 1.1% 진 것을 쉬쉬하던 판이었다. 천하가 다 아는 일을 말이다. 나는 본회의에 나가 “정부 여당이 야당에 졌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마구 떠들었다. 야당 의석에서 “옳소” “잘한다” 소리가 터져 나왔다.’
3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정가(政街)를 뒤흔드는 때아닌 신호탄이 터지니 바로 ‘백두진 파동’이었다. ‘백두진 파동’이란 박정희 대통령이 총선에서 기염을 토한 야당에 밀리지 않으려고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이었던 유정회(維政會) 의원 백두진을 국회의장에 내정한 것에서 발단이 됐다. 유정회가 무엇인가, 통일주체국민회의라고 하는 관선 조직이 ‘체육관 선거’를 통해 의석 3분의 1을 뽑는 국회의원 모임 아닌가.
신민당은 “지역구도 아닌 국회의원을, 더군다나 간접선거로 뽑힌 국회의원을 국회의장에 내정하는 것은 야당과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의장 선출 때 아예 본회의장을 퇴장하기로 한다. 여권은 “유신체제에 대한 정면도전”이라며 야당을 향해 “(만약 반대를 하고 싶다면) 퇴장 대신 본회의장에 출석해 반대하라”며 반대의 방법까지 제시한다.
어처구니없게도 신민당은 여당에 굴복한다. 의사진행발언으로 백두진의 의장선출 반대이유를 밝히고 투표에는 참여한 뒤 투표 후 전원 퇴장이 아닌 일부 퇴장하고, 이를 여당도 양해한다는 암수(暗數·속임수)식 절충안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민심의 동향은 폭풍전야의 긴장감으로 팽팽했지만 야당도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박 대통령은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두진 국회의장안’을 밀어붙였다. 이 일은 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처음으로 갈등을 빚은 일이기도 한데 이런 점에서 ‘백두진 파동’은 곧 있을 두 사람의 치열한 권력 투쟁과 10·26사태까지 이어지는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남산의 부장들’(김충식)에 나오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비서였던 C 씨 말이다.
‘정치 전반을 떠맡은 정보부로서는 국회가 잘 풀리려면 의장이 야당의 인망(人望)을 사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초장부터 배척 운동을 받는 백 의원이 국회를 잘 끌어갈 리 만무한 게 아닌가. 그런데 차 실장은 막무가내로 ‘(백 의장이) 충성하니 밀어준다’는 식으로 갔다. 79년의 파탄은 그런 데서 시작되었다. 기구가 있고 인원, 장비가 방대한 정보부는 공작도 하지만 그 결과와 책임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에 김 부장으로선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차 실장은 공(功)만 있고 책임은 없는 처지니까 마구 들쑤시고…김 부장보다 선수를 쳐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건수(件數)에만 신경을 썼다. 망조가 든 건지 총명하시던 박 대통령도 자꾸 차 실장에게 기울어져 갔다.’
어떻든 이틀간의 공전 끝에 3월 19일 여야 절충으로 본회의가 열렸다. 신민당 의원들은 모두 퇴장했고 이철승 등 6명의 최고위원과 원내총무만 참석한 가운데 백두진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비당권파 의원 16명을 규합한 YS는 “백두진의 지명은 국민을 능멸하는 처사”라고 비난하며 국회 본회의에 불참한다(백 의장은 몇 달 뒤 YS의 의원직 제명 과정에서 주도적인 힘을 행사한다).
YS의 강경 발언에 박정희 대통령의 감정이 폭발했다. 그것도 다름 아닌 기자들 앞에서였다.
백두진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이틀 뒤인 79년 3월 21일, 청와대 안 상춘재(常春齋)에서는 박 대통령과 청와대 출입 기자들과의 만찬이 있었다. 당시 청와대를 출입했던 동아일보 강성재 기자(전 민자당 성북을지구당 위원장)는 ‘김영삼과 운명의 대권’이란 책에서 그날의 만찬을 생생하게 묘사해 놓고 있다.
이날 만찬장에서는 YS에 대한 거친 언사를 포함해 오간 대화들도 흥미진진하지만 박 대통령이 말년에 갖고 있던 속내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자리이기도 했다. 강 기자의 글을 읽다보면 박 대통령 역시 오랜 집권에 대한 피로감으로 심신이 지쳐 있다는 게 느껴진다. 다음은 만찬 첫머리를 묘사한 강 기자의 회고다.
‘영애인 근혜 씨를 대동하고 방으로 들어선 박 대통령은 미리 대기 중이던 30명 가까운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다. 4명씩 앉을 수 있는 7, 8개의 교자상에는 6, 7가지 안줏감이 차려져 있었고, 술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 나중에 대통령의 설명으로 알게 됐지만, 이 술 주전자에는 김포 어느 술도가에서 특별히 만들어 배달한 김포 막걸리에 맥주를 섞은 혼합주가 들어 있었다. 마실 때는 부담이 적은 농주(農酒)지만, 한두 사발만 들이켜도 금방 취기가 오르는 술이었다.’
이날 저녁 상춘재 온돌방은 불을 너무 많이 지핀 탓이었는지, 방바닥이 뜨거운 편이었다. 방안이 더운 데다 다들 빈속에 독한 술이 들어가니 2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대부분 거나해진 얼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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