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 박정희 정권, 신민당사 농성 YH여공들 강제진압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9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92>YH사건

1979년 8월 9일 신민당사로 몰려 들어가 농성을 시작한 YH무역 여공들. 앳된 얼굴에서 우리 누이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이들의 저항은 이틀 만에 무참히 진압된다. 동아일보DB
1979년 8월 9일 신민당사로 몰려 들어가 농성을 시작한 YH무역 여공들. 앳된 얼굴에서 우리 누이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이들의 저항은 이틀 만에 무참히 진압된다. 동아일보DB
‘와이에이치(YH) 무역회사’ 노동자들은 79년 3월 30일 회사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폐업해버리자 넉 달 동안 노동청을 비롯해 관계 기관을 찾아다니며 필사적으로 대책을 호소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재야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지금으로부터 꼭 34년 전인 79년, 한여름이었던 8월 9일 아침, 몇몇 재야인사들이 상도동 김영삼 총재의 집을 찾는다. “YH무역이라는 회사가 문을 닫고 오늘 아침 기숙사에서 여공들을 쫓아냈다.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로 찾아가는 중이니 호소를 들어보고 당국에 해결책도 촉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 총재는 선뜻 “야당 당사(黨舍)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찾아오면 이야기를 듣고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말했다. YS의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2000년)에 나오는 대목이다.

‘사실 당시 신민당의 처지로서는 당사를 농성장소로 내준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불쌍한 여공들을 내몰면 더이상 갈 데가 없고 극단적인 사태도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어려운 사람들을 내가 보호해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흔히 ‘감(感)의 정치인’으로 불린다. 민심을 읽는 본능적인 정치 감각을 타고났다는 이야기다. 일반 사람들에게 낯선 중소가발업체인 YH사 여공들의 농성은 사건 그 자체로 보면 중소기업 노사 문제에 불과했다. 그러나 YS는 뭔가 정국의 대격변이 오고 있음을 직감한 듯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선뜻 야당 당사를 농성장소로 내줄 리 없었을 것이다.

YH 농성 사건을 통해 그는 의원직에서 제명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79년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종식시키는 정국의 중심이 되면서 국민들에게 ‘정치적 영웅’으로 부각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여공들은 8월 9일 오전 9시 반, 당사 문이 열리자마자 일제히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미 총재의 전화를 받은 직원이 여공들을 4층 강당으로 안내했다. 모두 187명이었다. 오전 10시쯤 당사로 나온 김 총재가 총재단 회의에서 농성을 받아들이게 된 경위를 간단하게 언급한 뒤 4층으로 올라갔다. 충혈된 눈으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20대 앳된 여공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감정이 북받쳐왔다. 김 총재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산업발전의 역군이며 애국자인데 이렇게 푸대접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경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신민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합니다.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강당 안에 커다란 박수 소리가 퍼졌다. TV에서나 보던 야당 총재가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주다니, 때마침 배달된 석간신문에는 농성장 사진과 기사가 크게 실렸다. 라디오 뉴스로도 크게 다뤄지고 있었다. 여공들은 ‘배고파 못 살겠다’라고 적힌 머리띠를 동여매고 농성에 들어갔다.

다시 김 총재의 회고다.

‘강당에서 자게 하고 모포 등을 사 주고 당사 앞 식당에서 설렁탕 비빔밥 등을 시켜 끼니를 해결해주었다…나는 보사부 장관과 노동청장에게 해결책을 강구토록 했으나 아무런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튿날 10일 낮 여야 총무회담을 열어 국회에서 논의할 것을 제의토록 했으나 여당 측은 거부했다.’

‘YH 여공들 신민당사 농성’ 소식은 정국을 강타했다.

유신 체제에 대한 불만이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음이 78년 말 총선 결과에 이미 반영된 후였지만 비로소 기층 민중들의 집단적 저항이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79년 1학기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학생데모도 일어나지 못했다. 겉으로 볼 때 시국은 평온했다. 하지만 폭풍전야의 상황이었다. YH 여공들은 감히 아무도 깨지 못했던 강요된 평온을 제일 먼저 깨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충격파를 흡수하기엔 유신체제는 너무 경직되어 있었다. 정부는 여공들이 농성에 들어간 바로 다음 날인 10일 오전에 강제해산을 결정한다. 일부 신중론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강경론의 위력에 묻혀버렸다. 경찰의 작전명은 ‘101작전’이라고 붙여졌다.

8월 10일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경찰이 곧 강제진압을 할 것이라는 소식이 신민당사에 퍼진 것은 밤 10시 40분경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긴급 총회를 열고 “경찰이 들어오면 모두 투신자살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일부 흥분한 노동자들은 창틀에 매달려 “뛰어내리겠다”고 울부짖었다. 일부는 실신해 병원에 실려가기까지 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결의문을 낭독하던 노조 조직부 차장 김경숙도 실신했다가 깨어나 다시 농성 대열에 합류했다.

밤 11시 20분경 2층 총재실에서 당원들과 함께 있던 김 총재는 농성장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흥분한 노동자들을 달랬다.

“결코 두려워 마십시오.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희를 붙들리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여태껏 경찰이 야당 당사를 습격한 적은 없었습니다. 나와 의원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그의 말에 노동자들이 안심이 되는지 하나둘 잠자리에 들기 시작했다.

자정을 넘기고 11일 새벽으로 접어들었다. 그러자 당사 주변에 경찰 병력이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대략 1000명 이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마침내 정·사복 경찰관들이 당사 주변 땅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기 시작했다. 소방차 헤드라이트가 당사를 비췄다. 그리고 새벽 1시 55분. 이순구 서울시경국장이 박한상 신민당 사무총장에게 “여공들을 내보내라”는 최후통첩을 하고 5분 뒤인 새벽 2시. 자동차 경적소리가 길게 세 번 울리더니 경찰 1000여 명이 한꺼번에 당사 담을 넘어 들이닥쳤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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