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 담화가 탄생한 것은 1955년 이후 이어진 자민당 일당 독재 체제가 일시적으로 무너진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치 비리가 이어지고 경제 불황이 시작되면서 자민당은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처음으로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공명당 등 8개 군소 야당이 ‘비(非)자민 연립정권’을 발족해 일본 정치사상 첫 야당 정권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 정권은 내부 분열로 10개월 만에 막을 내리고 1994년 6월 자민당과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정권이 탄생했다. 자민당은 당시 정권 재창출을 위해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사회당 당수에게 총리직을 양보해야 했다.
‘전후 50년’이라는 전기를 맞은 해에 정권을 넘겨받은 무라야마 내각은 피폭자 원호법, 사할린 잔류 조선인 영구 귀국, 일본군 위안부 등 ‘전후 문제 처리’를 정치 과제로 삼았다. 이런 배경에서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담화가 발표됐다.
아시아에 대한 사죄의 결정판으로 평가되는 무라야마 담화를 일본 정치권이 모두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자민당 주류인 보수진영은 아시아에 대한 사죄에 반감을 가졌다. 이 같은 불만은 잇단 망언을 통해 외부로 표출됐다. 담화가 나온 그해 10월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총무청 장관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은 좋은 일도 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무라야마 담화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 우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아예 담화를 수정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는 지난해 12월 31일자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사회당 당수였던 무라야마 총리가 내놓은 담화다. 21세기에 바람직한 미래 지향의 아베 내각 담화를 내고자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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