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YS의원직 제명 하루 전 극비 면담… 무슨 얘기 했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2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95>제명전야

김재규(왼쪽)가 중앙정보부장에 기용되기 직전인 건설부 장관 시절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건설공사현장에서 지시를 받는 모습. 동아일보DB
김재규(왼쪽)가 중앙정보부장에 기용되기 직전인 건설부 장관 시절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건설공사현장에서 지시를 받는 모습. 동아일보DB
YS의 인터뷰 내용이 뉴욕타임스지에 실린 것은 79년 9월 16일이었는데 그 전문(全文)이 국내 석간신문에 실린 것은 3일이나 지난 후인 19일이었다. 정부가 강경 방침을 결정하면서 신문 게재를 허용한 때문이었다.

정부와 여당은 YS의 인터뷰 내용이 “용공적인 이적행위이며 미국에 ‘민주화 압력’이라는 내정간섭을 요청하는 ‘사대발언(事大發言)’”이라며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했다. 사과와 해명을 하지 않을 경우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신민당은 “한국의 현실 정치 상황에서 마땅히 주장해야 할 발언을 한 것이며, 충정어린 애국적 발언이었다”고 맞섰다.

제1야당 총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으로 불이 붙은 여야 대치 정국은 이제 ‘총재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되어 폭발 일보 직전으로 간다.

마침내 공화당과 유정회는 9월 22일 160명 전체 여당 의원 연명으로 ‘김영삼 의원 징계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외국 여행 중인 여당 의원들에게는 귀국 명령이 떨어졌고 출국 예정 의원들은 일정을 바꿔야 했다. 10월 1일 여권은 고위 전략회의를 열고 제명방침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이날은 연례적으로 대통령 담화가 발표되는 ‘국군의 날’이었다. 다들 현 시국과 관련해 대통령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시종일관 국가안보와 남북관계가 주를 이루었다.

“과거 2∼3년간 북한 공산집단의 군비가 급격히 증가하여 한국에 대한 기습공격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휴전선 곳곳에서 남침용 땅굴을 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최근 우리 사회의 일각에 이러한 현실을 잊고 비생산적인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민심을 선동하고 사회 혼란을 조성하려 하고 있으니 그 구태의연한 작태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다가오는 80년대 우리 대한민국이 명실공히 막강한 고도 산업 복지사회로 등장하는 날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승산 없는 도박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대화의 자리로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최고조를 향해 치닫고 있던 정국 긴장과 관련해 몇 달 만에 처음 나온 대통령의 견해 표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헌 문제나 긴급조치 문제 등 시국을 풀어나가겠다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는, 강경한 입장 개진이었다.

물론 안보 문제가 여전히 심각하긴 했다.

국군의 날 다음 날인 10월 2일 미 하원 군사소위원회는 ‘북한군 규모가 세계 5위로 남한보다 강하다’는 골자의 군사력 보고서를 낸 것이다. 이는 박 대통령의 ‘남침 위협’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여야 극한 대치가 이어지고 국내 정세가 혼미한 상태에서 이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듣고 싶었던 국민들로서는 강경 입장만을 고수하는 대통령에게서 답답함을 느꼈다.

대통령의 강경 기조는 이틀 뒤인 10월 3일 개천절 경축사에서도 이어졌다. “부질없이 국론 분열과 사회 혼란을 조장하거나 국법을 어기고 공익을 해치는 등 지각없는 일부의 언동은 건전한 다수 국민의 지탄을 받을 것”이라며 반정부 세력과 반체제 세력에 대해 “긴급조치를 포함한 국법 준수를 하라”고 쐐기를 박은 것이었다.

그해 추석이 10월 5일이었는데, 여당은 추석 전에 전격적으로 YS의원직 제명을 처리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10월 3일 개천절 아침, YS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YS 회고록(‘나의 결단’)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한다.

‘도청이 극성을 부리던 시절이라 나는 누군가가 내게 전화를 걸 때면 미리 정해놓은 암호를 대도록 약속해 놓았다. 가령 전화를 건 사람이 “가회동 김 사장입니다” 신분을 밝히면 비서가 나를 바꾸는 식이었다. 그날도 “가회동 김 사장”이라고 해서 전화를 받았더니 “저, 김 부장입니다”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김 부장이라니, 누구냐”는 말에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입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답이 흘러나왔다. (중앙정보부가) 내 전화를 완전히 도청해왔다는 방증이었다. 나는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터라 “김 부장이 무슨 일로 내게 전화를 하는가?” 쌀쌀하게 대꾸했다. 김재규는 (내가) 전화를 받게 하려고 자기 신분을 속인 게 계면쩍었음인지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 “총재님을 급하게 좀 뵈었으면 합니다. 시간을 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대단히 급한 일이니까 곧 집으로 찾아가겠습니다” 말했다. “아니, 지금이 어느 판국인데 이렇게 사람이 많은 우리 집을 공개적으로 찾아온단 말이오, 할 말이 있으면 지금 전화로 하시오.” 내가 전화로 용건을 말하라고 재촉하자 그는 “낮이라도 좋으니 꼭 만나서 할 얘기가 있습니다. 호텔이 어떻습니까?” 물었다. 나는 “당신을 만날 이유가 없소. 설혹 있다 해도 호텔 같은 곳은 세상이 다 아는 곳인데 당신 만나는 것을 광고하러 다닐 생각은 전혀 없소”라고 거절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끈질기게 요청했다. 결국 YS도 마음이 흔들렸다.

‘굳이 그를 피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를 만나도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녁식사 약속이 있으니 저녁 8시 이후에나 만날 수가 있다고 했다. 장소는 내 집이나 호텔은 피하고 어느 곳이라도 좋다고 했다. 김재규는 자기가 잘 안 쓰는 공관이 있으니 그리로 나와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김은 저녁 8시 30분까지 장충체육관 앞으로 나오면 사람을 내보내 안내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떠나기 직전에 아내에게만 “김재규를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 “이 무시무시한 판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왜 단둘이서 만나느냐”고 아내는 걱정을 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김영삼#김재규#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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