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979년 10월 18일자는 계엄령이 내려진 부산 시가지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18일 오전 부산시청 경남도청 전화국 등 34개 관공서와 신문 방송 등 언론기관 정문 앞에는 착검한 M16을 집총한 완전 무장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에 임하고 있다. 학생들의 소란이 가장 심했던 남포동 광복동 진입로 등지에도 무장을 하고 투석을 막는 방석모를 쓴 경찰관들이 배치돼 있다. 시민들은 이날 오전 7시와 8시 방송뉴스와 신문을 통해 계엄선포 사실을 알고 평상시처럼 출근하고 가게 문을 열었다. … 군인들은 철모에 수통을 지닌 무장 차림으로 장갑차에 탑승해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부산시경 앞에도 장갑차가 동원돼 있고 영도다리 쪽으로 난 육교 위에는 전투 경찰관들이 올라가 경비에 임하고 있으며 중심가 골목마다 경찰관이 5∼10명 단위로 순찰하고 있다. … 16, 17일 학생 소요가 가장 심했던 광복동 거리 양쪽에는 무장군인 1명씩이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국제시장 주변에는 군인들의 경비 속에 상인들이 점포에 들어가려다 저지당하기도 했다.’
부산이 숨을 죽인 18일 오전, 마산의 경남대는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에 술렁였다. 도서관 앞 나무와 게시판에는 “청년 학도여, 거리마다 우리의 맑은 피를 뿌리자!”는 격문이 붙었다. “지금 부산에서는 우리 학우들이 유신독재에 의해 피를 흘리고 있다. (1960년 4·19를 부른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인) 3·15 의거정신을 잊었는가, 나가자!” 외침을 신호로 삽시간에 시위대 1000여 명이 모였다.
경찰 저지선을 가볍게 뚫고 도심까지 진출한 경남대생 대열에 마산대생들까지 합세했다. 마산항쟁 역시 부산 때와 마찬가지로 밤이 되자 점점 시민항쟁으로 번졌다. 식당 종업원, 영세상인, 일용노동자, 무직자, 구두닦이, 상점 종업원, 고교생 등이 시위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마산시위는 부산보다 더 격렬했다. 여당인 공화당 당사가 부서졌고 시내 여러 곳의 파출소가 습격당했다. 곳곳에서 박 대통령 사진이 떼어내어져 짓밟혔다.
결국 박 대통령은 18일 부산 계엄령에 이어 20일 0시를 기해 마산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한다.
‘부마 민중항쟁’은 누구도 그렇게 큰 시위로 발전할 줄 몰랐다는 점에서 비조직적 항쟁이었다. 하지만 대학생이나 소수 명망가들에 국한되어 있던 1970년대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 운동보다도 정권에 치명타를 입혔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항쟁의 원인을 좀 더 심층적으로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선은 이 지역을 정치 기반으로 하고 있던 YS의 의원직 제명이 도화선이 된 듯했지만 시민들까지 참여하게 된 데에는 생존이 위협당하는 경제적 위기가 있었다.
‘부산과 마산은 YS의 정치적 기반이어서 1979년 여름과 초가을의 정치 사태에 다른 지역 사람보다 더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고, YS의 의원직 제명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러할 수 있었다. 당시 앰네스티 부산지방 간사였던 허진수도 18일에 (부산에서) “김영삼 제명 철회!” 구호가 많이 나왔다고 증언했다. 그렇지만 항쟁 첫날 밤 10시쯤에 광복동에서 “김영삼” 연호가 터져 나오자 다른 한쪽에서 “여기서 김영삼이가 왜 나와? 우리가 김영삼 위해 데모했나?”라는 핀잔 섞인 반론이 나온 데서도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김영삼 제명에 분노해 항쟁에 참여한 시민도 있었지만 제명을 계기로 유신정권에 쌓인 불만이나 분노가 폭발한 시민도 적지 않았다.’(2009년 부마민중항쟁 3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당시 부산계엄사령부 합동수사반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부마항쟁의 1차 원인은 경제 침체에 의한 서민 상인층의 불만이었고 YS 의원직 제명은 두 번째였다.
부산 민심이 유신체제에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은 1978년 12월 총선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10명의 국회의원 중 5명이 야당인 신민당 소속이었고, 한 명은 유신헌법에 반대하며 공화당을 탈당했던 무소속 예춘호였다. 당선된 의원 6명이 모두 야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노의 밑바닥에는 바로 ‘경제’가 있었다. 부산 마산 두 곳은 1970년대 후반 불어 닥친 경기 불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2009년 학술 심포지엄 논문에는 당시 부산의 경제상황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부산 주민의 총생산 증가율은 1976, 1978년만 해도 각각 30.5%, 16.7%로 전국 국민총생산량의 증가율보다 월등히 높았는데, 1979년에는 5.6%로 급격히 떨어져 불황의 체감이 컸다. 지역별 임금 격차도 부산이 대도시인데도 1979년에 서울을 100.0으로 할 경우, 74.3으로 전북의 67.6을 제외하면 최하위였다. … 부도율도 아주 높아 1979년에 전국의 2.4배, 서울의 3.0배였다. 부산은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인데도 1979년 수출증가율이 10.2%로 역시 전국 증가율 18.4%에 훨씬 못 미쳤다.’
1979년 8월 현재 부산 사상공단 내 휴·폐업한 중소기업은 모두 77개사, 총 4100여 명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마산도 마찬가지였다. 마산수출공업단지는 1979년 9월 현재 24개 업체가 휴·폐업에 들어갔고, 이에 따라 5000∼6000명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었다. 일본 닛케이신문은 1979년 8월 4일자에서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진출한 일본 기업의 반 이상이 한국에서 철수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8월 8일 마산수출자유지역기업협회 조사에 따르면 ‘입주업체 102개사 중 10개 업체가 폐업했으며 나머지 92개사 중 46개 업체가 적자 경영을 이유로 동남아 등 타 지역으로 이동할 움직임에 있다’고 보고했다. 최대 규모의 중화학공업단지의 하나였던 창원공업지대에도 불황이 심했다.
민중들은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 절규하고 있었지만 정권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있었다. 정작 박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내부의 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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