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고종석 성폭행 1년… 사건발생 동네 ‘희망의 벽화’로 상처치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8일 03시 00분


“벽화속 아이처럼 이젠 활짝 웃었으면…”

전남 나주시 영산강 인근의 한 동네 골목길 벽면에 모녀가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골목길은 지난해 8월 30일 오전 1시 반 고종석이 A 양(당시 7세)을 납치한 뒤 성폭행할 장소로 가기 위해 지나간 길이다. 나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전남 나주시 영산강 인근의 한 동네 골목길 벽면에 모녀가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골목길은 지난해 8월 30일 오전 1시 반 고종석이 A 양(당시 7세)을 납치한 뒤 성폭행할 장소로 가기 위해 지나간 길이다. 나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27일 전남 나주시 영산강 인근의 한 동네. 강 둔치로 향하는 골목길 입구의 주택 담벼락에 모녀가 서로 껴안은 채 해맑게 웃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동네 곳곳에는 모녀 그림을 비롯해 천사와 나비, 아동용 캐릭터인 뽀로로 라바 등 90점의 벽화가 있다.

이 동네는 1년 전인 지난해 8월 30일 오전 1시 반 고종석(24)이 집에서 잠을 자던 A 양(당세 7세)을 이불째 들어 납치한 뒤 성폭행하고 살해하려고 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모녀 그림이 있는 골목길은 A 양 집과 바로 지척에 있고 고종석이 범행 당시 지나갔던 길이다.

인구 8만 명의 나주는 당시 고종석 사건으로 큰 충격에 빠졌다. 나주지역 문화 봉사단체 ‘때깔’은 지난해 11월부터 A 양 가족과 이웃들이 받은 상처를 씻어주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중 하나가 사건이 일어난 동네를 벽화로 꾸미는 ‘아이사랑 희망그리기’ 사업이었다. 올해 2월부터 인터넷으로 자원봉사자를 모으고 소액기부를 받아 사업을 진행했다. 이 동네 주민 120명은 4월 23일 하루 만에 자신의 집이나 상가의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동의서를 써줬다.

벽화 그리기 사업은 5월 3일부터 3일간 전국 각지에서 자원봉사자 5000여 명이 참여해 동네에 벽화나 타일벽화를 그렸다. 서울에 사는 한 모녀는 나주에서 2박 3일간 머물면서 벽화 제작에 참여했다. 자원봉사자들은 회비 2000∼3000원을 자발적으로 냈고 소액기부자 100여 명, 시민사회단체 80곳이 기부를 해 벽화비용 2000여만 원을 모았다. 부족한 돈 1700만 원은 나주시가 부담했다.

이날 범행 현장 인근에서 만난 나주 시민들은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경로당에서 만나 정모 씨(81·여)는 “고종석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섬뜩하다. 그나마 모녀 벽화 등 그림이 그려지면서 동네 분위기가 나아졌다”고 전했다. 택시운전사 이모 씨(57)는 “우리 사회는 대형사건이 터져도 한 달이면 잊혀진다”며 “다시는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김낙현 때깔 대표(43)는 “벽화 덕분에 분위기가 좋아져 요즘 주민들이 밤에 아이들과 함께 산책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며 “벽화가 고종석이 남긴 상처를 지우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벽화 속의 행복한 모녀와 달리 A 양 모녀와 가족들은 여전히 1년 전 사건으로 고통받고 있다. A 양과 그 가족들은 사건 직후 나주를 떠나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보금자리를 옮겼지만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아동성폭력 추방을 위한 시민모임인 ‘발자국’ 측은 A 양이 요즘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릴 때가 많다고 전했다. 신체적으로는 거의 회복했지만 정신적 후유증은 여전하다는 것. A 양의 아버지는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이며 엄마가 혼자 4남매를 키우고 있다. A 양은 악몽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뜬 눈으로 밤을 자주 새워 학교를 가도 제대로 수업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주위에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현정 발자국 활동가(35·여)는 “A 양 부모가 자녀들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는 등 사실무근의 헛소문으로 부모는 물론이고 자녀들도 큰 상처를 입었다”며 “A 양과 가족 모두 성폭행 사건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남 목포교도소에 수감됐던 고종석은 27일 광주교도소로 이감됐다. 다음 달 5일 광주고법에서 열리는 파기환송심 재판을 받기 위해서다. 대법원은 최근 2심에서 납치 혐의에 대한 법 적용을 잘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광주고법 관계자는 “고종석이 납치와 상관없이 성폭행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파기환송심에서도 형량에 변화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목포교도소 측은 “고종석이 식사를 꼬박꼬박 하며 지내고 있지만 파기환송심에서 더 무거운 형량을 받는 건 아닌지 긴장한 상태”라고 전했다.

나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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