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중 하나를 선택하시오. ①연봉 20% 삭감 ②직원 20% 해고 ③연봉 10% 삭감+직원 10% 해고.’
최근 증권업계에는 A증권회사가 전체 직원들을 대상으로 이 같은 설문조사를 실시했다는 소문이 쫙 돌았다. 하지만 A사 측은 “비용절감을 위해 전 직원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것은 맞지만 객관식이 아니라 서술형으로 적어내도록 했다”고 밝혔다.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증권업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면 “A증권 설문 들어봤어?”라거나 “다른 곳도 구조조정 들어간다며?”라는 이야기를 꺼낸다. 이는 감원에 대한 증권업계 직원들의 불안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실제로 증권업계에는 경영난이 심화하면서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 인력과 지점을 줄였거나 줄이기를 검토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 20년 넘은 ‘증권맨’들은 “1998년 외환위기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라며 고개를 젓고 있다.
○ “줄이고 또 줄여라”
KTB투자증권은 지난달 34명으로 구성된 모바일사업본부를 정리해 이 중 절반가량이 회사를 떠났다. 이 본부는 3년 전 증권 관련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제공하기 위해 출범했다. KDB대우증권은 임원 37명 가운데 3명이 회사를 떠났고 SK증권은 임원들이 연봉의 5%를 자진 반납 형식으로 줄였다.
3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현재 62개 증권사의 임직원 수는 4만1687명으로 지난해 6월 말에 비해 1899명(4.4%)이나 감소했다. 한 분기 전인 3월 말보다는 630명(1.5%)이 줄었다.
‘연봉과 직원 모두 10% 줄이기로 결정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A증권은 “아직 확정된 바가 없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A증권이 곧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뒤이어 3, 4개 증권사도 인력을 줄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증권사 직원은 “최근 우리 회사가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는 소문이 돌아 모두 깜짝 놀랐다”며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가뜩이나 실적이 안 좋은 상황에서 그런 소문까지 나니 불안하기만 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증권사 직원은 “그 어렵다던 외환위기 때 입사했는데 당시에는 증시가 금세 살아나 괜찮았다”며 “지금처럼 힘들고 어려웠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증권사들의 실적은 처참하다. 전체 62개 증권사 가운데 1분기(4∼6월)에 순이익을 낸 곳은 10여 곳에 불과하다. 많게는 200억 원대의 순손실을 낸 곳도 있다. 상황이 나빠지면서 증권사들은 지점 수 줄이기에 나섰다. 지난해 6월 말 1744개였던 증권사 국내 지점은 올에 6월 말 1565개로 감소했다. 1년 만에 179개(10.4%)가 문을 닫은 것이다.
○ 온라인 거래에 거래대금 급감까지…미래가 캄캄
일부 증권맨은 “현재가 바닥이 아닐까 싶다”라며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지만 증권업 자체가 기로에 섰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최근 증권사 실적 부진은 주가가 떨어지면서 주식거래대금이 급감한 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시장이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수익이 급증하긴 힘든 상황이다. 온라인 거래가 늘면서 수수료는 거래대금의 0.01∼0.5%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증권사 임원은 “주가가 올라도 앞으로는 예전과 같은 수입을 올리기 힘들다”며 “새로운 수익원을 발굴하는 게 최대 과제”라고 말했다.
올해는 채권이라는 ‘기댈 언덕’이 사라진 점도 칼바람이 더 매서워진 요인이 됐다. 한 증권사 임원은 “주가가 떨어져도 증권사들이 수조 원대의 자기자본으로 채권에 투자해 손실을 보전했지만 올해는 금리가 요동치면서 채권 투자에서도 손실이 나 타격이 컸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