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12월 4일 첫 공판 후 18일 결심 공판까지 14일 동안 8명의 피고인에 9차례 공판이 진행됐다. 거기다 결심 후 이틀 만인 12월 20일 사형이 선고됐다.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역사적인 재판이 역사상 유례없는 졸속이었다”며 “항소이유서 작성을 위해 원심기록과 수사기록을 복사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연필로 베끼는 것만 허용 받았다. 기록을 대충 읽어볼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항소이유서를 작성했다”(96년 ‘신동아’ 10월호)고 했다. 김재규의 사형 집행은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진(5월 17일) 직후인 80년 5월 24일 이뤄졌다. 당시 그의 구명운동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옹 등 재야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각본에 따른 정치재판’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김재규는 재판 과정을 통해 범행 배경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시종일관 10·26을 “민주회복을 위한 국민혁명”이라고 규정하고 스스로를 ‘혁명가’라 주장했지만 대통령을 시해한 후 나라의 판을 어떻게 다시 짜보겠다는 준비된 계획도, 대책도 없었다는 것이 재판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김재규는 항소이유서에서 “유신헌법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생각했다. 72년 내가 3군단장 시절, 군단을 방문했던 박 대통령을 연금시켜 놓고 하야시킬 생각도 했었다. 79년 4월에도 살해 계획을 세웠었다”고 했다.
그런데 2005년 3월호 월간조선은 10·26 직전에 김재규가 박 대통령의 생일(11월 14일)에 맞춰 최고급 명품시계를 프랑스에 주문했던 비화를 소개하면서 이 같은 증언에 의문을 던진다.
기사에 소개된 증언자는 10·26이 일어났을 당시 주제네바 대표부에 근무하던 N 서기관으로 그는 79년 8월 하순 중앙정보부 비서실 김모 행정비서관으로부터 “세계적인 명품시계 제작업체인 파텍 필립사에 의뢰해 ‘근축 탄신 1979’라는 문구를 새긴 회중시계를 한 달 내에 만들라. 김재규 부장의 각별한 관심사항이니 차질 없이 처리하라”는 전문을 받는다고 한다.
“기일에 맞추어 제작하기 어렵다”는 현지인들을 겨우 설득한 N 서기관이 10월 중순에 받아든 송장(화물을 받는 사람에게 보내는 명세서)에는 무려 1만9000달러(약 2000만 원)가 찍혀 있었다. N 서기관이 이 송장을 발송한 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10월 26일 오전, 한국 시간으로는 10월 26일 오후였으니 이미 궁정동 만찬이 잡힌 시간이었다. 월간조선은 ‘주인을 잃어버린 문제의 시계는 훗날 보안사를 통해 큰 영애(令愛)에게 전달됐다. (기사가 게재될)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표에게 “시계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흉물스러운 물건이라 잘 보관하지 않았고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N 서기관 말이 맞다면 생전에 시가 10만 원짜리 세이코 시계를 차고 다닐 정도로 소박했던 박 대통령이 과연 김재규가 준비한 값비싼 명품시계를 받았을지도 의문이지만 어떻든 김재규는 끝까지 대통령의 환심을 사려 했던 것 같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을 시해해 놓고 ‘민주혁명’ 운운하는 것은 월간조선의 지적대로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박 대통령은 김재규에게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육사 2기 동기생이긴 했지만 김재규는 소위 시절 면관까지 당한 일이 있어 진급이 늦었다. 박 대통령은 아홉 살 어린 그를 고향(경북 선산) 후배로 각별하게 챙겼다. 5·16이 성공하자 “이 나라 경제를 살리려면 농촌부터 살려야 한다”며 호남비료공장 건설 임무를 주면서 그를 사장에 임명했다. 이후 군의 요직인 6사단장(수도권 외곽 경비를 맡던 유일한 예비사단)과 보안사령관에 임명했고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에 발탁했다.
박 대통령이 김재규를 매우 아꼈다는 증언은 많다. 김계원 비서실장의 말(회고록)이다.
‘1965년 4월 대통령이 제1군사령부 시찰차 원주에 오셨다. 서울 상경 길에 “김재규 사단이 여기서 멀지 않지? 오늘 저녁은 재규 사단에 가서 한잔 하지” 하셨다. …저녁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데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재규, 저 놈 참 괜찮아. 저 친구 내가 장군이라는 칭호로 불러줘야 되는데 버릇이 되어서 말이야. 꼭 고향집 집안 막냇동생 놈 같으니 말이야. 참 착한 자요.”’
생전에 박 대통령을 향한 김재규의 충성도 대단했다. 김재규가 1년간 대구 대륜중학교 교사를 할 때 스승과 제자로 만나 흉금을 터놓는 가까운 관계를 이어왔다는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김 부장은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 벌떡 일어나 차려 자세로 전화를 받았을 정도였다”며 이렇게 말한다.
‘그가 73년 예편해 9대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내다 정보부 차장으로 발령이 났는데 내가 “군단장까지 지낸 국회의원이 어떻게 정보부 차장으로 가느냐”고 하자 “각하 명령이라면 어디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신직수였는데 신 부장은 김재규가 5사단 참모장으로 있을 때 법무장교(소령)로 데리고 있었던 부하였다. 하지만 모든 자존심을 죽이고 부하였던 신 부장을 상관으로 깍듯이 모셨다.’
한편 김재규는 70년대 말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상황 분석만 했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 대통령의 신임을 잃었다는 말도 있다. 훗날 재판정에서 김계원은 그의 성격을 묻는 검찰관의 질문에 “저돌적이었다. 추진력과 박력이 있었지만 뒷정리를 제대로 못해 매듭을 짓지 못하는 결점이 있었다. 하지만 의협심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최서영 전 코리아헤럴드내외경제신문 사장은 관훈저널(2012년 9월) 기고에서 KBS 보도국장 시절인 75년 9월 새마을지도자연수원에서 당시 건설부 장관이던 김재규와 일주일 동안 한방을 썼던 특이한 인연을 소개해 눈길을 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여서 지도급 인사들이 번갈아 새마을연수원에 입교해 합숙교육을 받았다…그때 김재규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내가 느낀 것으로는 그는 질서를 존중하는 전형적인 군인, 그것도 죽음의 미학을 찬양하는 일본 사무라이를 동경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일본특파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세지마 류조(瀨島龍三·전 이토추 종합상사 회장·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만주군으로 참전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직속상관이었다)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해 온 것이 생각난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재규는 어릴 때부터 일본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을 존경해 왔다고 한다. 명치시대 군인인 노기 대장은 러일전쟁 때 뤼순(旅順)을 함락시킨 장군인데 명치천황이 죽자 아내와 함께 순사(殉死)한 일본 최후의 사무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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