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개봉 앞둔 ‘설국열차’ 봉준호 감독 “나에게 혁명이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0일 02시 18분


봉준호 감독. 동아일보 DB
봉준호 감독. 동아일보 DB
"한국에서는 '설국열차'에 대해 정치적 철학적 해석을 하는 다양한 논쟁이 있었는데, 프랑스에서는 SF장르 영화 자체로서 즐겨주는 반응이 신선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다음달 30일로 예정돼 있는 영화 '설국열차'의 프랑스 개봉을 앞두고 9일 파리에 있는 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설국열차'는 3일 프랑스 언론시사회에 이어, 7일에는 제39회 도빌 아메리카 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상영돼 관객들의 기립박수와 현지 언론의 뜨거운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가의 도빌 영화제에서 한국인 감독과 스코틀랜드 여배우(틸다 스윈튼), 프랑스 원작 만화가가 함께 레드 카펫을 밟는 기분은 묘했습니다. '살인의추억' '괴물' '마더' 등 제 전작 영화도 모두 프랑스에서 개봉했지만, 이번 작품은 처음부터 국제적인 프로젝트여서 감회가 다르더군요."

'라빠'(1995년)로 베를린영화제에서 금곰상을 수상했던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은 '설국열차'의 시사회를 보고 난 후 "드라마적인 긴장감과 적절한 유머, 휴머니즘, 아이러니적인 요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예리한 묘사들이 훌륭하게 배합돼 있는 놀라운 작품"이라고 평했다.

봉 감독은 ""아직까지 차기작은 결정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무인도'를 배경으로 한 상상력 넘치는 영화를 꼭 한 번 찍고 싶다"고 말했다.

― 프랑스 시사회 반응은 어떤가.

"프랑스의 베르트랑 타베르니 감독님은 제가 대학시절 영화 동아리에서 작품을 보며 공부했던 거장 감독님이신데, 시사회에서 제 영화를 직접 보시고 인터뷰를 하시는 모습을 보고 정말 감개무량했다. 저는 2004년에 '살인의 추억', 2006년에 '괴물', 2009년에 '마더'를 개봉할 때 프랑스를 찾기도 했습니다. 인터뷰를 나온 까이에 시네마, 르몽드, 리베라시옹 기자들이 매번 만났던 기자들이라 친숙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국 관객과 프랑스 관객의 반응의 차이는.

"영화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관객들의 리액션에서는 차이는 별로 없다. 그러나 아시아와 유럽, 미국에서 장르 영화에 대한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유럽에서는 공상과학(SF) 장르영화에 대한 열혈 팬들이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설국열차'에 대해 진지하게 정치적, 철학적 해석을 하고 우리의 사회현실과 비교하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SF영화는 SF영화 자체로 즐기는 분위기다. 8일 일반 관객 시사회에서도 SF영화, 호러 영화 오타쿠들이 득시글댔다. 이들은 좀비가 등장하거나, 창자가 쏟아지는 장면이 나오면 박수를 치고 난리다. SF장르에 대한 순수한 쾌감을 보여주는 반응이 신선하고 재밌다."

―프랑스에서의 흥행예상은.

"제 전작 영화인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도 프랑스에서 개봉을 했었다. 두 작품은 원래 소규모로 개봉을 했었다. '괴물'은 250여개 극장에서 개봉했지만 흥행 성적은 별로 안 좋았다. '설국열차'의 경우도 250-300여 개 스크린에서 개봉할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에서 개봉된 제 영화 중에서 '설국열차'가 최초로 흥행에 성공할지 궁금한 상황이다."

―봉 감독의 이전 작품도 물론 해외에서 개봉됐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영어로 제작된 첫 작품이다.

"'설국열차'는 1986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돼 앙굴렘 만화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받았던 원작에 기초해서 만든 영화다. 이 만화는 2005년에 한국에서 프랑스의 그래픽 노블로 번역돼 출간됐고, 제가 평소 즐겨찾던 만화방에서 우연히 집어들게 됐다. 그리고 7~8년의 세월이 흘러 영화로 만들게 돼 고향인 프랑스로 찾아오게 된 것이다. 마치 연어가 고향을 찾아온 것과 같아 프랑스의 원작 만화가들은 무대인사를 할 때 특히나 감개무량해 하셨다.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온 영화감독이 미국, 유럽의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어 프랑스 관객들 앞에서 서니 그 분들도 감정이 복받쳤나보다. 창작자 입장에서는 그 감정이 상상이 가더라."

―프랑스 원작 만화와 영화는 얼마나 다른가.

"흔히 오리지널 시나리오 쓰는 것 보다 각색이 더 쉽다고 생각하는데, 어렵긴 마찬가지다. 각색을 할 때는 원작을 모조리 삼켜서 분해하고, 새롭게 해석해내야 한다. 마치 뷔페 식당에 가서 전체 음식을 다 먹고, 소화시켜,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만들어내야 한다. 물론 지구에 빙하기가 오고, 인류의 생존자들이 달리는 기차 안에 타고 있고, 그들이 싸고 있다는 원작 자체의 독창적인 발상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모든 인물들의 캐릭터, 이름, 사건 전개 과정은 원작과 전부 다르다."


―미국에서의 개봉일정은 어떻게 되고 있나.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영어권 국가의 배급은 하비 와인스타인 컴퍼니가 맡고 있다. 와인스타인은 타란티노 감독의 파트너로 유명하며, 오스카상 프로모션의 황제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회사는 미국 관객들의 취향에 맞춰 빠른 속도 전개를 위해 대폭 편집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왕가위 감독의 '일대 종사'(그랜드 마스터)도 23분 정도가 잘려나갔다. '설국열차'도 비슷한 편집을 요구하고 있는데, 감독 입장에서 보면 기분은 좋지 않다. 영화의 스토리와 캐릭터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 관객의 템포에 맞는 속도감을 낼 수 있는 방향으로 가려고 협상 중이다. 이러한 협상이 마무리되면 미국에서의 개봉 일정이 정해질 것 같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살인의 추억' 개봉할 때는 '괴물'을 준비 중이었고, '마더'를 개봉할 때는 '설국열차'의 판권을 계약한 상태였다. 영화를 개봉하면서 차기작 준비가 안 된 것은 처음이다. 낯설지만 기분이 좋다. 왠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에서 꽤 알려진 SF원작 소설을 기초로한 영화 시나리오를 제안 받은 게 있어서 검토 중이다. 언젠가는 무인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고 싶다. '로빈슨 크루소'부터 '캐스트 어웨이', TV드라마 '로스트'까지 무인도는 항상ㄷ 상상력을 자극한다. 무인도에서는 엑스트라가 필요없기 때문에 정말 연기력 좋은 배우들만 섬으로 모셔가서 영화를 찍고 싶다."

―'설국열차'에 대한 정치 사회적 해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문학자, 문학평론가, 정치평론가부터 심지어 종교계에 계신 분들까지 이 영화를 다양하게 해석한다. 이러한 평론을 읽어볼 때마다 재밌다.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 멋있어 보이는 것은 나중에 인터뷰 때 써먹기 위해 기억해놓는다. (웃음) 이것은 제가 각색해서 펼쳐놓은 스토리가 단순하면서도 원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상황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대입하기가 쉬운 것 같다. 기독교에 계신 분들은 인류 구원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고, 정치 사회학자들은 계층과 계급, 사회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어떻게 하면 꼬리칸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하는 커티스와 기차 시스템 자체에서 탈출하려는 송강호로 압축된다. 기차가 일직선이듯이 이 영화의 스토리가 갖고 있는 직선적인 내러티브, 거기에 인물들의 앞뒷면을 보여주는 원형적인 캐릭터가 있다. 비판과 찬사가 다양하게 섞여 있지만, 논의 자체를 많이 생산해내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텍스트를 제공한 것에 대해서는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핵심은 SF영화라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SF장르 영화에 대한 애정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설국열차'는 시스템 혁명을 주제로 한 영화다. 당신은 영화를 통해 혁명을 꿈꾸는가.

"나에게 '혁명'이란 죽을 때까지 영화를 찍는 것이다. 히치콕 감독은 60세의 나이에 세련되고 혁신적인 공포영화인 '사이코'를 촬영했다. 영화를 계속 찍고 싶은 것은 상을 받거나, 흥행을 위해서가 아니다. 또한 영화를 통해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회를 바꾸려다 지친 사람에게 극장에서 2시간 동안 휴식을 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영화가 사회를 바꾸는 힘에 대해서는 큰 확신이 없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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