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3월 다시 감옥으로 들어간 김지하의 옥중 생활은 79년 10월 만 4년 8개월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해 여름부터 김지하는 100일 참선을 시작했다. 하루에 30분 운동하는 것 이외에는 깨어서는 물론이고 잘 때도 가부좌를 틀고 잤다. 얼굴은 거의 ‘해골바가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말라갔다. 가족과 변호사들이 번갈아 와서 건강을 걱정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100일이 흘렀다. 김지하는 “다른 건 다 잊었어도 날짜 가는 것만은 속으로 꼬박꼬박 세고 있었다”고 했다.
그날은 맑고 밝은 가을날이던 79년 10월 27일이었다. 그날도 김지하는 참선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 무렵 구치소 내 방송에서 무슨 말이 계속 흘러나오는데 그의 귀에 꽂히는 말이 있었다.
“고 대통령께서” “고 박 대통령께서” “고인께서”….
아니, 도대체 저것이 무슨 소리일까?
‘고’라니? ‘고 대통령’이라니? ‘고인’이라니?
김지하는 서서히 일어나 문 쪽으로 가서 문짝에 바짝 몸을 붙인 채(위에 있는 텔레비전 모니터의 시계·視界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짝에 몸을 바짝 붙이는 게 그의 버릇이 되었다) 교도관에게 물었다.
“저게 무슨 소리요?”
교도관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오른손으로 자기 목을 탁 끊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탁!”
그리고 또 목을 끊는 시늉을 하며 반복했다.
“탁!”
“에엥? 누가?”
교도관은 오른손 엄지를 높이 세웠다.
“엇! 박정희가?”
김지하가 놀라 이렇게 말하자 교도관은 오른손을 얼른 입에 갖다 댔다.
“쉬잇!”
김지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또 물었다.
“누구야? 누가 그랬다는 이야기야?”
교도관은 입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것이었다. 순간, 김지하의 머릿속에는 세 마디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내 속에서, 내 속 저 밑바닥에서 꼭 허공 중에 애드벌룬 떠오르듯이 그렇게 세 마디 말이 줄지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인생무상. 첫 번째 마디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두 번째 마디였다. 그리고 나도 곧 뒤따라가리다. 세 번째 마디였다. 이튿날 12시 추모방송에 나온 김수환 추기경의 첫마디도 인생무상이었다. 그렇게 소름끼치는 경험을 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가 말한 이튿날이란 79년 11월 3일이었다. 그날 서울에서는 건국 이후 최초로 국장(國葬)이 엄수됐다. 동아일보 3일자 1면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5·16 후 18년 5개월 동안 이 나라를 통치했던 박 대통령은 모든 사람이 일손을 놓고 슬픔으로 근조(謹弔)하는 가운데 말없이 유택(幽宅)에 묻혀 역사(歷史) 속으로 사라졌다. 이날 국장은 청와대 발인제로부터 시작해…오전 9시 26분 국향(菊香)에 뒤덮인 고인의 유해는 15년 10개월 16일 동안 정들었던 청와대 본관을 하직했다.’
영구차는 사관생도들이 도열한 가운데를 지나 오전 9시 26분 대형 태극기가 교차 게양된 청와대 정문을 나섰다. 영구차가 나가는 동안 예순을 갓 넘긴 고인의 나이대로 62발의 조포(弔砲)가 울렸다.
오전 10시 전 국민이 1분간 묵념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영결식은 TV로 생중계 됐다. 영식(令息)인 지만 육사 생도, 영애(令愛) 근혜 근영 양 등 유가족과 밴스 미 국무장관 등 41개국 조문 사절 및 각계 인사 등 3000여 명이 참석했다.
최규하 권한대행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흐레 전 천지(天地)가 진동하여 산천초목이 빛을 잃었고 경악과 비탄으로 온 국민의 가슴이 메었습니다. 아직도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하실 일이 많은데 각하 자신마저 가셨으니 이 얼마나 망극한 일입니까”라며 조사(弔辭)를 읽었다. 마지막으로 “이제 영부인 곁에서 고이 잠드소서” 하며 울먹이는 대목에서는 참석자들도 함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장내를 뒤덮었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7분 동안의 조사 낭독이 끝난 뒤 불교 조계종 찬불가대의 합창과 윤고암 종정의 영가법어(靈駕法語), 윤월하 총무원장 등 10명 법사(法師)의 독경이 있었다. 뒤이어 김지하가 옥중에서 들었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가 시작됐다.
추기경은 “인생은 무상하며 주만이 영원하시니 주여 인자로이 주의 종 박대통령의 영혼을 받아 주시고 광명의 나라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다음은 추기경 회고록 중 일부다.
‘나는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는데 참석자들이 모두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 시대를 호령한 절대 권력자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빌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박 대통령을 생각할 때마다 애석(哀惜)의 정을 감출 수 없다. 그분이 쌓은 업적을 보건대 제3기 집권야욕을 꺾고 정권을 이양했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받는 국부(國父)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영결식이 끝나고 쇼팽의 ’장송 행진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낮 12시 19분경 영구차가 중앙청 정문을 빠져나갔다. 그동안에도 조객들의 오열은 계속됐다. 영구차가 지나가는 중앙청∼세종로∼시청 앞∼서울역∼국립묘지 도로변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애도 인파가 몰렸다고 신문들은 전한다. 동아일보의 보도다.
‘이날 중앙청과 정부종합청사 주변에는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시민들이 몰려나와 연도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며 오전 9시경에는 애도 인파로 빽빽이 들어찼다. 연도 요소요소에는 확성기가 설치돼 조가(弔歌)와 박 대통령의 육성이 수시로 흘러나왔는데 시민들은 아예 라디오까지 들고나와 고인의 육성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박 대통령 유해는 고 육영수 여사의 묘소 오른쪽에 안치됐다. 이날 서울 하늘은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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