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최인호. 25일 ‘별들의 고향’으로 떠난 고인은 1970년대 청년문화의 중심에서 도시적 감수성에 기반을 둔 개인의 삶을 밀도 있게 그려낸 영원한 청년이었다.
해방둥이인 그는 1945년 10월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55년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또래 아이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조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장래희망을 소설가로 정한 것도 초등학교 입학 무렵이었다. 고교 2학년 때인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벽구멍으로’로 입선해 문단을 놀라게 한 작가는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견습환자’가 당선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1970년에는 어린아이가 술꾼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그린 단편 ‘술꾼’을 발표했다. 같은 해 결혼한 그는 이듬해 음성 나환자촌의 미감아와 지역 주민들의 갈등을 담은 ‘미개인’을 비롯해 ‘예행연습’ ‘침묵의 소리’ ‘타인의 방’을 선보였다. 1972년 현대문학상 신인상을 안겨준 ‘타인의 방’은 현대 도시인의 불안과 소외, 고독을 제대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3년 작가는 조선일보에 소설 ‘별들의 고향’을 연재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 김승옥이 시도했던 ‘감수성의 혁명’을 더욱더 과감하게 밀고 나간 끝에 가장 신선하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으로 삶과 세계를 보는 작가”(조남현 전 서울대 교수)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가가 1975년부터 월간 샘터에 연재한 연작소설 ‘가족’은 2010년 연재를 마치기까지 무려 35년 동안 작가의 가족, 주변 이웃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대중 독자들과 소통했다. 그의 연재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국내 잡지 최장 연재기록으로 남아 있다.
1978년에는 교도소를 탈출한 살인범들이 경찰과 대치해 인질극을 벌인 사건을 소설화한 ‘지구인’을 문학사상에 연재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중편 소설 ‘돌의 초상’은 도시 윤리의 냉혹성과 인간의 이중 심리를 제대로 파헤쳤다는 평을 받았다.
1980년대에도 상업소설과 본격소설을 오가며 지치지 않는 생산력을 보여줬다. 도시 중산층의 개인주의적 생리를 파악하고 이들의 욕망과 환상을 그려내는 데 주력한 이 시기에 작가는 ‘불새’(1980년) ‘지구인’(1980년) ‘안녕하세요, 하느님’(1981년) ‘깊고 푸른 밤’ ‘위대한 유산’ ‘적도의 꽃’(이상 1982년) ‘고래사냥’ ‘가면무도회’ ‘전람회의 그림’(이상 1983년)을 펴냈다. 1983∼84년에는 동아일보에 ‘겨울나그네’를 연재했다.
문단의 손꼽히는 악필이었던 작가는 원고지에 써내려 가는 육필 작업을 고수한 작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펜을 고수하는 이유에 대해 “한 자 한 자 소설 쓰는 정성은 펜이어야 가능하다. 또 ‘나를 떠나가는 문장’에 대한 느낌은 자판과 펜이 현격히 다르다”고 했다.
1989년 중앙일보에 장편 ‘길 없는 길’, 1990년 현대문학에 ‘구멍’, 1991년 조선일보에 ‘왕도의 비밀’을 연재했다. 1993년에는 중앙일보에 3년간 연재한 글을 다듬어 불교소설 ‘길 없는 길’을 냈다. 한국 불교를 중흥한 경허 선사와 제자들을 그린 이 소설을 쓰면서 전국의 절을 돌아다녔다. 승복과 밀짚모자를 걸치고 서울의 밤거리를 활보한 날도 있었다.
1995년 한국일보에 ‘사랑의 기쁨’을 연재한 뒤 1997년 같은 신문에 연재한 ‘상도’는 판매부수가 300만 부가 넘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조선시대의 거상 임상옥의 인생유전을 다룬 ‘상도’는 바른 상행위와 경영의 도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1987년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가톨릭에 귀의한 작가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2008년 5월 침샘암으로 수술을 받고도 투병 기간 틈틈이 글을 썼다. 그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서울주보에 실은 투병기에서 “주님, 이 몸은 목판 속에 놓인 엿가락입니다. 그러하오니 저를 가위로 자르시든 엿치기를 하시든 엿장수이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라며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2011년 장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출간 후에는 “내년 만우절 기자회견을 열고 ‘암에 걸렸다고 한 것은 외로워서 관심을 끌기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소원이다”라며 유쾌한 모습을 과시했다. 당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말 쓰고 싶은 글을 한 편이라도 쓰고 죽는 작가가 거의 없다. 그런데 백척간두의 고통 속에서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작품을 쓸 수 있었고, 독자들로부터 사랑받으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라고 말했다.
올해 2월에는 등단 50년을 맞아 서울주보에 연재했던 글을 엮어 산문집 ‘최인호의 인생’을 펴냈다. 이 책을 마친 뒤 피정(避靜·가톨릭 신자들의 수련생활)을 떠나겠다고 했던 작가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피정을 떠났다.
고인은 신문연재 때문에 고 김수환 추기경이 청한 점심식사 자리를 마다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는 “서재 벽에 추기경님의 초상을 걸어놓고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언젠가 천상의 식탁에서 지상에서 미뤘던 점심식사를 하게 될 것을 믿는다”고 했다. 작가는 지금쯤 김 추기경과 마주 앉아 밀린 회포를 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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