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에 2009년은 뜻깊은 해다. 세계 최초로 리튬이온 전기자동차 배터리를 상용화한 데 이어 세계 첫 양산형 전기차인 GM ‘볼트’의 배터리 공급 업체로 선정됐다. 2000년 신규 사업 진출을 위해 전기차 배터리 개발을 시작한 이래 9년 만의 성과였다.
전기차 배터리는 국내 제조업계 역사상 최초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낸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제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LG화학을 시작으로 삼성SDI, SK이노베이션이 신성장동력 발굴 차원에서 가세하면서 한국산 전기차 배터리가 세계 시장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국내 배터리업체들이 해외 시장에서 꾸준히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국내 전기차 시장이 하루빨리 활성화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 배터리를 제외한 나머지 전기차 부품 개발능력이 미진한 것도 개선돼야 할 과제로 꼽히고 있다.
○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
가솔린 및 디젤 엔진 같은 내연기관과 달리 모터로 작동하는 전기차에서 배터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LG화학 관계자는 “전기로만 달리는 순수 전기차 1대에는 노트북컴퓨터 300대분의 배터리가 들어간다”며 “전기차 생산 원가의 25∼30%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전기차의 최대 화두가 ‘한 번 충전해서 몇 km를 달릴 수 있느냐’인 만큼 배터리 용량은 곧 전기차 성능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자동차업체들도 전기차 연구개발(R&D) 단계에서부터 배터리업체와 협력할 정도다.
2011년 기준 LG화학과 삼성SDI가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35%를 차지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인 내비건트리서치는 2013년 LG화학을 전기차 배터리 분야 업계 1위로 선정했다. 삼성SDI는 5위에 이름을 올렸다.
기술력도 국내 업체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LG화학은 ‘스택 앤드 폴딩(stack & folding)’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 기술은 같은 크기의 다른 회사 배터리보다 용량이 10% 정도 크고 안정적이다. 또 알루미늄필름 주머니 안에 전지의 핵심 소재인 양극재, 음극재, 분리막 등을 넣어 구성한 ‘파우치’ 형태로 생산해 폭발 위험이 없고 열 발산이 쉬워 배터리 수명이 긴 게 장점이다.
LG화학 기술연구원 관계자는 “한 번 충전에 300km를 달릴 수 있는 배터리를 2020년을 목표로 개발하고 있다”며 “전기차도 1회 충전에 휘발유 차량과 비슷한 거리를 갈 수 있게 된다면 그동안 거리 문제 때문에 구입을 꺼리던 사람들도 전기차를 구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SDI는 현재 BMW 등에 세계 최대 용량인 60Ah급 고용량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기존 30∼40Ah급 배터리에 비해 많은 양의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어 한 번 충전으로 긴 거리를 주행할 수 있다. 이 배터리가 장착된 BMW ‘i3’는 한 번 충전으로 160km까지 갈 수 있다. 삼성SDI 관계자는 “세계에서 우리만 유일하게 60Ah 배터리를 만드는 기술이 있다”고 말했다.
○ 활기 찾은 생산라인
최근 들어 BMW 등이 전기차 출시를 발표하는 등 전기차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자 국내 배터리업계도 활기를 되찾고 있다.
LG화학은 지난해 7월 준공했지만 전기차 판매 부진으로 가동을 중단했던 미국 미시간 주 홀랜드 배터리공장을 10월 재가동해 GM 볼트에 배터리를 납품할 계획이다. 2011년 준공한 세계 최대 규모 배터리 생산 공장인 LG화학 오창공장 역시 최근 전기차를 개발하는 세계 자동차업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삼성SDI 울산공장은 최근 수요가 늘어나자 2, 3라인을 증설하고 있다. 4분기(10∼12월) 완공 예정인 생산설비 확충이 끝나는 대로 배터리 생산에 착수할 계획이다. 삼성SDI 관계자는 “최근 수요가 크게 늘어 내년에도 2개 라인을 증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9월 전기차 1만 대에 공급할 수 있는 생산능력을 갖춘 서산공장을 가동한 데 이어 올해 말까지 5000대분을 생산할 수 있는 라인을 증설할 계획이다.
○ 배터리 못 따라가는 다른 부품들
전문가들은 내수 시장의 성장 없이 수출에만 의존하는 전기차 배터리산업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이나 미국 배터리업체들이 자국 완성차업체에 배터리를 공급하면서 세력을 넓히고 있는 반면에 국내 업체들은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내수 기반이 없어 불리하다”고 말했다.
배터리를 제외한 다른 전기차 부품의 생산 및 개발 능력도 하루빨리 끌어올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기차를 구성하는 주요 부품은 배터리 외에 전기모터, 배터리 관리시스템(BMS), 전기모터를 구동하는 인버터 등 다양하다. 이 가운데 전기차 구동 때 배터리 사용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BMS는 전력효율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이다. 현대자동차는 2010년 9월 전기차 ‘블루온’ 시제품을 내놓았을 당시 동반성장 차원에서 전기차 관련 상당수 핵심 부품 개발을 중소기업에 맡겼다. 이 과정에 참여해 BMS를 개발한 넥스콘테크놀러지는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다가 지난해 10월 상장 폐지됐다.
전기차용 콘덴서를 만드는 뉴인텍, 배터리팩을 만드는 파워로직스 등 초창기 국산 전기차 개발사업에 참여했던 중소 부품업체 대부분이 상당 기간 실적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전기차가 곧장 판매로 이어지지 않아 공급 물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대형 부품업체인 독일 콘티넨탈이 유럽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에 힘입어 BMS 등 다양한 전기차 관련 부품을 공급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강동완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연구원은 “현대모비스 등 국내 부품업체들도 전기차 전용 부품 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 보쉬 콘티넨탈 덴소 등 글로벌 기업들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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