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뜬 밤. 고양이들이 공터에 모여 각자의 이름과 꿈을 이야기한다. 그 공터는 현명한 할아버지 고양이 올디가 사는 곳이다. 갑자기 도둑고양이 탐탐이 등장해 축제 분위기를 망친다.’
‘어린이캣츠’ 민사소송 공방중
1일 서울 강북구 꿈의숲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어린이캣츠’의 줄거리다. 뮤지컬 좀 봤다 싶은 사람이면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와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인 ‘캣츠’를 대뜸 떠올릴 것이다. ‘캣츠’ 초반부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고요한 밤. 고양이들이 축제를 열고 선지자로 존경받는 올드 듀터로노미를 기다린다. 문득 나타난 악당 맥캐버티가 일으킨 소동으로 고양이들은 겁에 질려 흩어진다.’
인터넷 블로그에 ‘어린이캣츠’를 관람한 사람들이 올린 글은 비슷비슷하다. “브로드웨이 4대 뮤지컬 중 하나인 ‘캣츠’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재구성한 공연이라고 하네요.”
어린이 관객과 기념촬영을 한 배우들은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미간과 코끝을 까맣게 강조해 고양이로 분장했다. 달빛 아래 홀로 서서 ‘메모리’를 열창하는 ‘캣츠’의 그리자벨라가 보여준 분장과 판박이다.
그러나 ‘어린이캣츠’와 ‘캣츠’는 판권 관계가 없다. ‘캣츠’의 국내 공연 판권을 보유한 기획사 설앤컴퍼니와 ‘어린이캣츠’ 제작사인 극단 뮤다드는 2010년부터 부정경쟁행위 소송 공방을 벌이고 있다.
2011년 4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어린이캣츠’가 뮤지컬 ‘캣츠’의 명성에 편승하려 했다”며 원고 설앤컴퍼니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다음 해 1월 서울고등법원은 “한국어로 번역한 뮤지컬 ‘캣츠’는 2008년부터 공연한 반면 ‘어린이캣츠’는 2003년부터 공연했다”며 사건을 기각했다. 대법원 판결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다.
곳곳서 해외 원작물 무단 도용
규모는 빠르게 커가고 있지만 저작권과 관련한 기본적 가이드라인도 갖추지 못한 한국 뮤지컬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례다. 국내 기획사가 해외 뮤지컬 공연 판권을 사들여 한국어로 번역해 무대에 올린 것은 1996년 5월 삼성영상사업단의 ‘브로드웨이 42번가’가 처음이다. ‘아가씨와 건달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 이전의 해외 원작 뮤지컬은 모두 판권 협의 없이 국내 기획사가 임의로 베껴 제작했다. ‘캣츠’가 1981년 영국에서 초연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는 한국어 ‘캣츠’가 등장했다. 원작 제작사 RUG는 2000년 한국 법원에 이에 대한 공연금지가처분신청을 냈다. 최근의 ‘캣츠’는 그 후 정식 판권 계약을 해 제작한 것이다.
공연저작권 관리기관 없어 혼란
대법원이 ‘어린이캣츠’의 손을 들어줘도 RUG가 다시 직접 소송을 낼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RUG가 저작권에 대한 국내 업계와 관련 기관의 낮은 이해도를 확인하고 포기했다는 것이다. 김종헌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공연저작권 문제를 관리하는 주체가 없으므로 비슷한 문제는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어린이뮤지컬이라며 공연 중인 ‘미녀와 야수’도 디즈니의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저작권 관계가 없다. 2009년에는 국내 공연 판권이 없는 제작사 GMB컴퍼니가 ‘아가씨와 건달들’을 공연하려다가 저작권자의 항의를 받고 ‘잭팟’으로 제목을 바꿨다. 그보다 한 해 전에는 ‘브로드웨이 42번가’의 내용을 살짝 바꾼 ‘Go! 브로드웨이 42번가’가 민사소송에 걸려 패소했다.
양혜영 CJ E&M 공연마케팅팀장은 “판권 확인도 중요하지만 품질을 보장할 수 없는 공연이 어린이 관객의 ‘첫 공연 경험’이 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