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 X파일의 X파일]고춧가루 편이 뿌린 ‘고춧가루’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5일 03시 00분


제조업체 잠입취재중 중국인 직원들에 발각… 촬영테이프 모두 뺏겨

3일 오후 서울 동아미디어센터 3층 휴게실에서 만난 장시원 PD는 좀 지쳐 보였다. ‘먹거리 X파일’ 고춧가루 편이 방영되는 4일 밤까지는 잠자기 틀렸다고 했다. 고춧가루 편 취재는 장 PD에게 약간의 고춧가루를 뿌렸다.

시작은 7월에 장 PD가 ‘착한 먹거리 캠프’를 준비하던 중 걸려온 제보 전화 한 통이었다. ‘많은 업체가 중국산 습다대기(젖은 다대기)를 건조 가공한 혼합 고춧가루를 쓴다. 못 믿겠다면 두부에 넣고 끓여보라. 두부의 색이 붉게 변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혹시나 해서 고춧가루를 사다 두부를 끓여봤다. 두부가 착색된 공산품처럼 선명한 분홍색으로 기괴하게 변해갔다. 장 PD는 그 길로 문제의 고춧가루 성분 검사를 연구 기관에 의뢰했다.

“습다대기에는 고추 함량이 적기 때문에 대개 국내 공장에서 고추를 추가하고 (홍국 적색소 같은) 붉은 색소도 첨가합니다. 가장 힘든 건 이렇게 만들어진 혼합 고춧가루가 일반 고춧가루와 육안으로 구분이 안 간다는 거예요. 고추 농사 30년 지은 농부, 요리 연구가, 고추 유통에 30년 매달린 분도 구별을 못 해내니 취재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연구 기관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장 PD는 속이 까맣게 탔다. 현장 취재는 진행 중인데 결정적 근거가 없으니 초조했다. 연구 기관은 “확실히 하기 위해 검사를 한 번 더 했으면 한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고춧가루는 너무 널리 쓰이는 거여서 기관에서도 위험 부담을 줄이려는 것 같았어요.” 한 달의 기다림 끝에 “홍국 적색소가 검출됐다”는 답을 듣는 순간 장 PD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러던 어느 날, 경북 영양에서 취재 중이던 장 PD의 휴대전화에 “지금 인부들에게 둘러싸였다”는 다급한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발신자는 중국 고춧가루 제조업체에 취재 간 후배 신참 PD였다. 잠입 중에 중국인 직원들에게 발각된 것.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한 시간 동안 통화가 안 됐어요. 그 60분간 오만 생각이 지나갔죠. 왜 후배를 보냈을까. 내가 갔어야 했는데….”

한 시간 뒤,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촬영한 테이프를 모두 뺏겼다고 했다. 장 PD는 MBC ‘PD수첩’ 시절부터 최근까지 수많은 ‘진실의 문’ 앞에 섰던 자신을 돌아봤다. “멋진 말로 하면 진실을 찾으러 가는 건데, 그 문 앞에 서면 언제나 두근대고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경력이 2년이든 30년이든 똑같을 거예요. 앞으론 절대로 조연출을 혼자 위험한 곳에 보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죠.”

진실 앞에서 떨리는 붉은 심장처럼 장 PD의 트라우마는 이제 붉은 먹거리로 옮겨 왔다. “이제 빨간 음식을 먹기가 두려워요.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가장 힘든 부분이 바로 끝없는 의심과 배신감을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왜,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단 걸 깨달았을 때 드는 배신감 있잖아요. 매일 먹는 먹거리에 숨겨진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기분이란 딱 그거거든요.”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고춧가루#먹거리 X파일#착한 먹거리 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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