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MB5년]<27>‘무대(무성 대장)’의 백의종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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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탈락 앞둔 김무성 탈당선언문 읽어보다 “이건 아니다”

19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이 예상됐던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이 2012년 3월 12일 국회에서 백의종군을 선언한 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을 받고 있다. 김 의원은 당시 “우파 분열의 씨앗이 될 수 없다”며 ‘당 잔류’를 선택했다. 김 의원은 올해 4월 재선거에서 당선돼 결국 국회로 돌아왔다. 동아일보DB
19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이 예상됐던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이 2012년 3월 12일 국회에서 백의종군을 선언한 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을 받고 있다. 김 의원은 당시 “우파 분열의 씨앗이 될 수 없다”며 ‘당 잔류’를 선택했다. 김 의원은 올해 4월 재선거에서 당선돼 결국 국회로 돌아왔다. 동아일보DB
2012년 3월 9일 국회 의원회관 420호. 김무성은 30분째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23년간 몸담았던 당이 또다시 자신을 저버리려 하고 있었다. ‘무대’(무성 대장·김무성 의원)의 낙천은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18대엔 친박이라는 이유로, 19대에는 박근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등을 돌렸다는 이유로…. 얄궂은 운명이었다.

낙천의 씨앗은 낮은 지지율이었다. 박근혜와 각을 세우면서 탈박(脫朴)한 게 지역 민심을 흔들어 놨다. 그는 공천혁명을 위해 당이 내놓은, ‘여론조사로 현역 의원 하위 25%를 공천 배제한다’는 컷오프 룰에 걸렸다. 부산에서는 김무성(남을)을 포함해 3명이 낙천 대상이 됐다.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 3월 4일 다음 날인 5일 공천심사위원회 회의.

A공심위원=“김무성을 낙천시키고 부산 선거를 어떻게 치릅니까. 문재인(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사상구에 출마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데 차포 떼고 이길 수 있겠습니까.”

B공심위원=“이대로 공천하면 부산 선거 망칩니다. 반드시 김무성을 살려야 합니다.”

부산 공천이 김무성 문제에 걸려 진척되지 못하자 정홍원 공천심사위원장(현 국무총리)은 권영세 당시 사무총장(현 주중대사)과 함께 6일 박근혜 위원장을 찾았다. 이 자리에는 부산 중진인 서병수 의원(해운대-기장갑)도 참석했다.

정홍원=“컷오프 룰이 헌법처럼 돼 있어 약간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박근혜=“어려움은 잘 이해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예외를 만들다 보면 시스템 공천의 틀이 무너지게 됩니다.”

박근혜의 원칙을 허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김무성은 살려야 했다. 그래서 나온 안(案)이 사상 출마였다. ‘문재인과 그를 꺾을 수 있는 거물을 붙인다’는 명분으로 공천을 주자는 거였다. 총대는 서병수가 멨다. 서병수는 며칠 뒤 부산 지역구에 머물고 있는 김무성을 찾았다. 두 사람은 해운대 파크호텔에서 만났다.

“선배님이 사는 방법은 문재인과 붙는 것뿐입니다.” 김무성은 뚱한 표정으로 서병수를 바라봤다. “잘 생각해 보세요. 문재인을 꺾으면 거물이 됩니다. 잘못돼도 당이 희생정신을 높이 사지 않겠습니까.”

김무성이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뗐다. “나한테 굴욕을 강요하지 마라. 난 내 지역구를 지키겠다.” 두 사람은 같은 호텔에서 한 차례 더 만났지만 김무성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김무성은 일부 친박 세력이 ‘문재인을 꺾어주면 좋고, 낙선해 제거돼도 좋다’는 생각으로 사상 출마를 권유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낙천이 기정사실화되면서 외부의 구애(求愛)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보수진영에서는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이 이미 국민생각을 창당하고 새누리당 낙천자들을 접촉하고 있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가세설까지 나오면서 힘을 받는 분위기였다. 구심점 없이 흩어져 있는 비박 세력을 화학적으로 결합시킬 촉매제는 김무성이었다.

부산 지역구에 머물고 있는 김무성에게 박세일이 전화를 걸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모처에서 만났다. 박세일은 “친이계를 비롯해 박근혜에게 비판적인 보수세력이 모두 뭉쳐 비박연대를 하면 승산이 있다”는 논리를 폈다. 그럴듯한 구상이었지만 현실정치가인 김무성의 가슴에는 와 닿지 않았다. 정운찬과도 가끔 만나며 “동업하자”는 말을 나눴지만 더이상 진전은 없었다.

그 사이 심대평 자유선진당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무성도 충청권에 확실한 기반을 가진 선진당에 관심이 있던 차였다. 김무성은 심대평의 메신저와 부산에서 만났다.

메신저=“저희 당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김무성=“무슨 생각을 갖고 계신가.”

메신저=“공동대표를 맡아 모든 것을 협의해서 결정하자고 하십니다. 당명 개정을 비롯한 총선 준비 작업도 의원님께서 지휘해 주십시오.”

김무성은 선진당을 중심으로 비박이 뭉치는 게 더 승산 있다고 판단했다. 선진당 의석 15석에 새누리 낙천 의원 25명가량을 합치면 기호 3번으로 선거를 치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을 굳히지는 못했다.

김무성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3월 9일 서울로 올라왔다. 그날 저녁 낙천한 친이계 초선들은 서울 여의도 한정식당인 다원에 모여 있었다. 강승규 권택기 김성회 유정현 이화수 신지호 등 10여 명은 “보복 편파공천에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며 전의를 다지고 있었다. 오후 9시경 김성회의 전화를 받은 김무성이 다원으로 합류했다.

A 의원=“형님이 와 주셔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김무성=“다들 마음고생이 클 텐데 희망을 잃지 말자. 회관에서 탈당 선언문을 쓰다가 아우들 전화 받고 왔다. 지금 선진당과 함께 신당을 창당하는 문제를 논의 중이다. 박세일 정운찬까지 합세시켜 새누리당을 ‘박근혜 당’으로 만들고, ‘비박 범우파 신당’을 만들면 우리도 해볼 만하다. 비례대표 1번은 박선영 의원으로 하는 방안을 생각 중이다.”(당시 박선영은 탈북자 북송에 반대하며 중국대사관 앞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었다.) 김무성의 구상을 듣고 있는 의원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김무성=“절대 개별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내가 깃발을 들면 아우들도 동참해야 한다.” 자리에 모인 의원들은 폭탄주를 들고 건배를 외치며 ‘도원결의’를 했다.

다음 날 회관으로 출근한 김무성은 보좌관들과 함께 탈당선언문 마무리 작업을 했다. 전날 모임에서 나눈 말들이 언론을 통해 흘러 나가면서 김무성의 탈당은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우파 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었다. 그날 밤 최경환 의원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두 사람은 서울 힐튼호텔 바에서 만났다.

최경환=“총선 분위기가 안 좋습니다. 형님이 탈당하면 당이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형님이 죽겠다는 결심을 해야 당이 살고 장기적으로 형님도 살 수 있습니다. 공천 결과에 무조건 승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김무성=“이렇게 억울하게 물러나라는 거냐. 당신 충정은 잘 알겠다. 고민해 보자.”

김무성은 일요일인 11일에도 회관으로 출근해 선언문을 가다듬었다. 선진당과 신당을 창당하는 안과 무소속으로 독자 출마하는 안 두 가지로 문안을 작성했다. 만약을 대비해 불출마하는 안도 만들어 뒀다.

문안은 완성됐지만 마음은 계속 흔들렸다. 신당을 만들면 ‘보수 대분열’을 몰고 왔다는 비난이 그에게 쏟아질 게 뻔했다. ‘두 개의 당적을 갖지 않겠다’던 소신도 그를 흔들었다. 오후 11시경 김무성은 결국 신당 창당을 포기하고 무소속 출마로 마음을 바꿨다. 그러고는 12일 오후 2시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예고했다.

12일 오전 10시경 김무성은 회관에서 무소속 출마회견문을 연습 삼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뭉클해졌다. ‘이건 내 갈 길이 아닌데….’ 무엇보다 23년간 몸담았던 당을 떠난다는 말을 입으로 뱉을 자신이 없었다.

김무성=“안 되겠다. 당 못 나가겠다.”

보좌관=“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출마는 해야 합니다.”

김무성=“이건 아닌 거 같다. 무소속으로 나가도 ‘우파 소분열’ 아니냐. 나 때문에 좌파가 집권하게 만들 순 없다. 그냥 백의종군하자. 불출마 선언문 가져와 봐라.”

김무성은 마음이 변할까 봐 기자회견 시간을 오전으로 앞당겼다. 석간신문은 이미 1면 제목을 ‘김무성 탈당’으로 인쇄한 상태였다. 오전 11시 반 국회 기자회견장에 선 김무성은 굳은 표정으로 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누구보다 당을 사랑했던 제가 그 당을 등지고 적으로 돌아서 동지들과 싸우는 것은 제가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제가 우파 분열의 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백의종군이 제가 갈 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수없는 격려전화와 1000여 건의 문자가 쏟아졌다. 친분이 두터운 정갑윤 의원은 전화로 울음을 쏟아냈다. 박근혜 위원장도 전화로 “큰 결단을 내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격려했다.

김무성의 백의종군 선언과 정운찬의 총선 불출마 선언은 탈당을 준비하던 친이계 의원들에게 직격탄이 됐다. 도원결의를 했다고 생각했던 친이계 낙천 의원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회견을 바라봤다. 안상수 전 대표를 비롯해 진수희 권택기 신지호 강승규 의원 등은 김무성처럼 백의종군을 선언하며 당에 남았다. 결국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52석을 얻어 과반을 지켰다. 김무성의 백의종군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성적이었다.

김무성을 비롯한 대다수 친이계 낙천 의원들은 그해 12월 치러진 대선 승리에 힘을 보탰다. 김무성은 1년 뒤인 2013년 4월 부산 영도 재선거를 통해 국회로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대선을 위해 뛰었던 친이계 낙천자들은 당으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지금껏 정치권 주변을 맴돌고 있다. 김무성은 동지들과 상의 없이 백의종군을 선언한 일에 대해 지금도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다. 김무성은 늦었지만 그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수모를 당하고도 당에 남아준 그분들의 결단이 없었다면 우파 재집권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당이 그분들께 아무런 예우를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과 당을 위한 결단은 반드시 평가받을 것입니다.”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MB#김무성#무성 대장#MB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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