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된 ‘보그(패션잡지) 병신체’의 사례다. 문화와 예술 분야의 외국어 남용 실태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이다.
일상 업무에서도 외국어와 어려운 한자가 언어 건강을 해치고 있다. 회사에서 상사와 부하 직원은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오퍼레이션 로스의 파서빌리티가 있으니까 리포트해(운영자의 손실이 생길 수 있으니 점검해서 보고해).” 이른바 ‘은행 외계어’는 이렇다. ‘익영업일에 불입한 당발송금은 기설정된 계좌에 산입돼 처리됩니다(다음 영업일에 낸 외화송금은 이미 설정된 계좌에 포함해 처리합니다).’
인문학자들이 쓰는 ‘인문학 외계어’는 그 뜻을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나의 텔로스는 리좀처럼 뻗어나가는 나의 시니피앙이 그 시니피에와 디페랑스 되지 않게 함으로써 그것을 주이상스의 대상이 되지 않게 컨트롤하는 것이다.’
권재일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는 “우리말에 대한 자긍심이 부족해, 또는 자기 과시를 위해 이런 말을 쓰는 현상이 발생한다”며 “프랑스나 중국처럼 외국 문물의 유입 때 국가기관이 적극 나서서 자국어로 대체하는 용어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 “쉬운 말이 인권”… 공공언어도 문제
포괄수가제(의료비 정찰제), 스크린도어(안전문), 복지 바우처(복지 이용권), 가이드라인(기준), 리스크(위험)…. 공문서나 공공부문 언어 중 우리말로 충분히 대신할 수 있는데 어렵게 쓴 용어들이다. 이처럼 공공언어도 시민에겐 ‘이해 불가’일 때가 많다.
판결문이나 법전에는 일본식 한자어가 여전하다. 일상에서 안 쓰는 ‘시정(施錠·잠금)’ ‘신병(身柄·몸)’ ‘미연(未然·먼저)’ 같은 법조계 용어는 일반인에게 높은 문턱이다. 헌법 조문에도 일본식 용어가 많이 쓰인다.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은 8일 보도자료를 내고 “전체 130개 헌법 조문 중 29%인 37개 조문에서 ‘기타’와 같은 일본식 용어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가 올해 4∼6월 17개 정부 부처와 국회, 대법원이 발표한 보도자료 3068건을 조사한 결과 외국어 발음을 그대로 쓴 경우는 총 1만6795회로 자료 한 건당 5.5회를 기록했다. 공공기관이 외국어를 그대로 쓴 주요 사례로는 힐링(치료), 모멘텀(동력), 스토리텔링(이야기 전개), 스태프(직원), 포럼(회의) 등이 꼽혔다.
영국 정부는 1979년 마거릿 대처 총리 취임 때부터 공공문서를 쉬운 말로 쓰는 ‘쉬운 영어 사용하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2010년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도 ‘쉬운 글쓰기 법안(Plain Writing Act)’을 마련해 시민 눈높이에 맞는 공문서를 쓰도록 하고 있다.
한글문화연대 관계자는 “어려운 공문서 때문에 봉사해야 할 공무원이 되레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며 “알권리를 비롯해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쉬운 공문서가 필수”라고 말했다. 구연상 숙명여대 철학과 교수는 “꼭 명사(名詞)로 표현하지 말고 풀어쓰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도우미’ ‘누리꾼’처럼 우리말 조어를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라고 조언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