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경쟁 상대는 다이아몬드나 밍크코트다. 캐딜락은 운송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다.”
대공황으로 자동차 판매가 급격히 줄어들던 1930년대 초. 미국 제너럴모터스(GM) 산하 자동차 브랜드 ‘캐딜락’ 사업부 총책임자였던 니콜라스 드라이슈타트는 고급화 전략을 썼다. 캐딜락은 1934년에 전년 대비 70%가 넘는 성장을 기록하며 세계적인 고급차 업체로 자리 잡았다.
크라이슬러가 생산하고 있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지프 랭글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장을 누볐던 미군 차량 ‘윌리스 MB’에 뿌리를 두고 있다. 크라이슬러는 1990년대 말 랭글러를 유럽 시장에 선보일 때 이 차에 ‘해방자(liberator)’라는 별칭을 달았다. 유럽인들에게 지프는 전쟁에서 벗어나게 해준 자유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분석에서였다. 크라이슬러는 유럽에서 다른 모델은 별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유독 지프만큼은 반응이 좋았다.
자동차는 사용 목적이 뚜렷한 공산품이면서도 인간의 감성을 자극한다. 소비자들은 차를 구입하기 전까지 가격이나 연료소비효율(연비), 유지비와 편의장치 등을 꼼꼼히 따져 보지만 막상 구입을 결정할 때는 브랜드 이미지나 디자인 같은 감성적인 요소를 보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 문화인류학자로 컨설팅 업체 아키타이프 디스커버리스 월드와이드 최고 경영자(CEO)인 클로테르 라파유 박사는 소비자가 무의식 중 문화적 경험을 토대로 자동차에 각자의 의미를 부여한다고 분석했다. 냉철한 이성적 판단보다 감성이 앞서는 소비자 행동은 역사와 경험, 기억 등에 기인한 것이라는 얘기다. 라파유 박사는 이런 현상을 ‘컬처코드(culture code)’로 정의했다.
자동차회사들은 최근 소비자의 감성에 호소하기 위해 컬처코드를 활용한 제품 개발과 마케팅 전략을 펼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세계 자동차 산업이 무한 경쟁으로 치닫고 기술력이 상향 평준화되면서다. 업체들의 전략은 국가별, 업체별, 제품별로 큰 차이가 있다. 미국은 ‘자유로운 경험’, 한국은 ‘사람과의 매개체’
라파유 박사는 저서 ‘컬처코드’(2007년)에서 국가별로 소비자들이 자동차에서 중시하는 가치를 분석했다. 결론은 미국은 ‘개성과 관능’, 독일은 ‘성능’, 일본은 ‘경제성’이었다.
컬처코드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자동차에서 성능보다 자유롭고 관능적인 경험을 떠올린다. 주말의 교외 드라이브, 처음 운전석에 앉았을 때의 해방감, 뒷좌석에서의 첫 섹스 등 다양한 이미지가 혼재한다.
실제로 미국에서 잘 팔리는 자동차들은 실내 공간이 넓고 높은 엔진 배기량을 갖춘 모델이 대부분이다. 미국 시장에서 압도적인 판매 1위 모델은 일반 승용차가 아닌 픽업트럭 ‘포드 F시리즈’(1∼9월 55만9506대)다. 이 차는 성인 5명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실내공간과 널찍한 적재공간을 갖췄다. 원래 용도인 ‘짐차’보다는 레저용품을 싣고 여행을 떠나는 데 많이 쓰인다. 2위도 역시 픽업트럭인 쉐보레 ‘실버라도’(36만775대), 3위는 일본 도요타가 미국 시장을 겨냥해 만든 중형세단 ‘캠리’(31만8990대)다.
독일인들은 자동차 성능, 그중에서도 엔진을 중시한다. 기술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독일인들이 차를 평가할 때도 같은 잣대를 적용한다는 분석이다. 유럽 최대 자동차 업체인 폴크스바겐과 고급차 브랜드인 BMW, 아우디, 메르세데스벤츠는 파워트레인(엔진과 변속기 등 차의 구동계통 부품) 분야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BMW는 독일 뮌헨 본사 빌딩을 4기통 엔진 모양으로 지을 정도다. 독일 판매 1위인 폴크스바겐 ‘골프’는 한 차종에 4종류의 엔진을 쓴다.
일본인들은 차를 살 때 경제성을 최우선 평가 기준에 둔다. 전체 승용차 판매 비중의 30%가 경차다.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익숙한 일본인들은 작은 차에도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1960년대 국민차였던 스바루 ‘360’은 배기량 356cc의 초소형차였다. 최근에도 닛산 ‘노트’, 혼다 ‘피트’ 등 소형차가 판매 상위권을 휩쓴다. 현대자동차가 일본 시장에 진출했다가 2009년 판매 부진을 이유로 철수한 가장 큰 원인은 가격이나 품질보다도 중·대형차에 치우친 제품군 구성 때문이었다는 게 자동차 업계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유지비가 낮은 하이브리드카나 전기차 등 친환경차 개발에도 관심이 많다. 생산 현장에서도 경제성이 우선이다. ‘마른 수건까지 쥐어짜는’ 도요타 고유의 현장 생산성 혁신운동 ‘가이젠(改善)’이 대표적이다. 2차대전 이후 검소한 생활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삼아 온 일본인들의 행동 양식이 자동차 산업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어떨까. 현대차가 최근 한국 소비자 394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자동차를 볼 때 떠올리는 단어로 ‘가족’(43.2%·1702명)을 가장 많이 지목했다. ‘연인과의 추억’(5.7%), ‘친구와의 우정’(2.2%)을 합하면 절반이 넘는 51.1%가 자동차를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 주는 매개체로 인식하고 있었다. 역대 국산차 중 가장 많이 팔린 차도 대표적인 ‘패밀리 세단’인 현대차 ‘쏘나타’다. 1985년부터 2013년 10월까지 29년간 누적 300만 대가 팔렸다.
김상대 현대차 국내마케팅실장(이사)은 “이번 조사를 통해 한국 소비자들은 자동차를 단순한 교통수단이나 부의 상징, 성공의 척도가 아닌 삶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문화적 요소가 마케팅을 지배하기도
“알파벳 F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단어가 두 개 있지. 하나는 여인(Female), 또 하나는 페라리(Ferrari)야.”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한 대사다.
이탈리아 페라리는 자사 모델을 ‘그녀(she)’라는 3인칭 대명사로 즐겨 부른다. 페라리는 올해 생산 대수를 7000대 이하로 줄였다. 지난해는 7318대를 팔았다. 올 들어서도 차는 여전히 잘 팔리고 있지만 2003년 이후 10년 만에 감산을 결정했다. 페라리의 ‘희소성 전략’에 따른 것이다. 수요보다 적은 차를 만들어 소유욕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루카 디 몬테제몰로 페라리 회장은 “우리가 파는 것은 자동차가 아닌 꿈”이라면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꿈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전 세계의 수많은 ‘티포시’(tifosi·이탈리아어로 ‘열광적인 팬덤’. 주로 페라리 팬들을 가리킴)를 사로잡는다.
컬처코드는 자동차 마케팅에서도 두드러진다. 시장 상황에 맞춰 판매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영국 태생인 소형차 브랜드 ‘미니(MINI)’는 문화 마케팅으로 인기를 끈 대표적인 사례다. ‘평범하지 않다(Not normal)’는 슬로건을 내세워 독특한 상자형 차체와 차체 곳곳에 스며든 복고풍 이미지를 강조한다. 미니는 회사 차원에서 소유자들에게 ‘특별함을 공유하고 있다’는 소속감을 안겨 주는 데 주력한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미니 소유주들만의 문화 축제 ‘미니 유나이티드’가 대표적인 사례다.
도요타가 고급 브랜드 ‘렉서스’의 대규모 리콜 사태 이후 취한 조치는 일본의 장인정신 ‘모노즈쿠리’(物造り·‘물건을 만들다’는 뜻)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것이었다. 제품의 기본 설계 단계부터 생산까지 전 과정을 갈아엎고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얘기였다. 외관 디자인은 일본 무사를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느낌으로 바꿨다. 이미지 상승을 위해 슈퍼카 ‘LFA’도 내놨다. 렉서스는 올 8월 미국에서 고급 브랜드 차량 판매 1위를 탈환했다.
자동차에 감성을 덧입히려는 시도는 제품 개발 과정에서도 엿보인다. 이탈리아 고급차 브랜드인 마세라티는 엔진에서 나는 소리를 듣기 좋게 만들기 위해 개발 과정에 음악가를 참여시킨다. 영국 재규어는 ‘아름답고 빠른 차(Beautiful and fast car)’가 개발 모토다. 더 멋진 디자인을 내기 위해 차체를 철강 대신 알루미늄으로 만들 정도다.
“자동차는 숫자와 데이터 놀음이 아닌 열정의 산물이다.” 미국 자동차 업계의 ‘전설’ 밥 러츠 전 GM 부회장이 한 얘기다. 그의 말처럼 자동차가 단순히 공장에서 조립된 기계로만 치부할 수 없는 ‘E팩터(Entertainment factor·오락적 요소)’를 갖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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