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代의 끝자락에서 위험한 ‘악마의 곡’을 불사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7일 03시 00분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 28일부터 5개도시 연주투어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파가니니 카프리스 전곡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처음에 할 때는 시작하기가 어렵고 갈수록 편안해졌는데 이번에는 첫걸음은 쉽게 뗐지만 음악적으로 파고들다 보면 갈수록 힘들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파가니니 카프리스 전곡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처음에 할 때는 시작하기가 어렵고 갈수록 편안해졌는데 이번에는 첫걸음은 쉽게 뗐지만 음악적으로 파고들다 보면 갈수록 힘들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그 힘든 걸?”

어떤 바이올리니스트가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곡 전곡 연주를 한다고 하면 대개 이런 반응이 나온다. 워낙 고난도의 기교로 점철된 작품이라 연주자의 기량이 탄탄하지 않으면 청자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악마의 곡’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연주자가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28)라면 일단 안심이다. 게다가 이번이 세 번째 전곡 연주니까.

파가니니 카프리스는 바이올린 콩쿠르와 오디션, 실기 시험에서 빠지는 일이 없다. 바이올리니스트라면 항상 연습하는 곡이지만 연주용으로 무대에 올리는 이는 많지 않다. 실수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위험한 곡이어서다. 음악평론가 최은규는 “파가니니 카프리스는 기술적으로 완벽하면서도 음악적으로 훌륭하게 소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감히 전곡 연주를 시도하는 연주자는 드물다”고 말한다.

권혁주는 2004년 3월 러시아 유학 시절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전곡 연주를 했고, 이듬해 4월 서울 금호아트홀에서 한 번 더 무대에 올랐다. 이번 공연은 28일 대전 충남대 정심화국제문화회관을 시작으로 여수, 광주, 부산을 거쳐 11월 1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까지 5개 도시를 내달린다. 3만∼10만 원. 02-2055-1556

15일 만난 권혁주는 “서른이 되기 전 손가락이 잘 돌아갈 때 파가니니 카프리스에 한 번 더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연주회를 마치면 이 곡에 더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두 차례 전곡 연주를 통해 테크닉의 노하우를 깨쳤으니 24개 카프리스를 음악 그 자체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파가니니에게 트라우마가 있어요. 곡이 어려워 테크닉을 구사하는 그 자체부터가 무척 불편하거든요. 파가니니 작품을 연주하다 보면 테크닉 쫓아가기에 바빠서 음악적인 면을 놓아 버리게 돼요.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이탈리아의 정열이 깃들어 있고, 활짝 열린 문처럼 쉽게 말을 건네죠. 한 곡 한 곡이 짧은 시와 이야기예요.”

그는 10세 때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그 시절은 그에게 회색으로 기억된다. 한밤중 집 앞에는 총을 든 취객이 잠들어 있었고 마약 중독자들이 버린 주사기가 계단 구석에 굴러다녔다. 슈퍼마켓에 가면 살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힘든 순간을 잊게 하는 건 음악에 몰두하는 시간이었다. 파가니니 카프리스 전곡 연주에 도전한 것도 스승인 차이콥스키음악원 예두아르트 그라치 교수의 제안 덕분이었다.

권혁주는 지난해 2월 안양대 최연소 교수로 임용돼 화제를 모았다. 재능 있는 젊은 연주자가 학교로 가기로 결정하자 음악계에서는 안타깝게 여기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는 “나로서는 잘한 선택”이라고 했다.

“음악 전공자들은 20대 중반 이후부터 30대 초중반까지 레슨 말고는 할 게 없어요. 오케스트라 들어가기는 이르고, 강사도 30대 들어서야 가능하고요. 한마디로 말하면 백수죠. 학교에서 제안이 왔을 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교수 생활을 하면 악기를 놓게 될까 봐 걱정했는데 오히려 연주 횟수도 많아졌고, 생활이 안정되니까 연주도 더 좋아졌어요.”

교수이자 연주자로 숨 가쁘게 생활하면서도 그는 칼라치 콰르텟, 올림푸스 앙상블, MIK 앙상블, 오푸스 앙상블 등에 참여하며 실내악에도 열성을 보이고 있다. 스스로를 한껏 부각시키는 독주와 달리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서로 호흡을 맞춰 가는 실내악을 통해 연주자로서 균형을 찾으려고 한다. “매 순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는 그는 20대의 끝자락에서 기량과 음악성을 치열하게 갈고 닦고 있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바이올리니스트#권혁주#파가니니 카프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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