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나이에 대기업의 정직원이 되다니 꿈을 이룬 거죠. 어깨에 힘이 다 들어가네요.” 29일 서울 관악구 관악로에 있는 올리브영 서울대입구2호점. CJ그룹 계열 드러그스토어인 이곳의 매장 매니저 한선화 씨(37·여)는 상기된 얼굴로 회사 로고가 박힌 사원증을 내보였다. 그는 “결혼 전 작은 의류회사의 디자이너로 일할 때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주눅이 들곤 했다”라고 회상했다. 11년 전 임신하면서 일을 그만뒀던 한 씨는 4년 전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다시 일할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이제 포기할까” 고민하던 차에 올해 8월 CJ그룹의 경력 단절 여성 인턴 채용에 지원해 합격했다. 한 달 반의 인턴 과정을 거쳐 이달 21일부터 시간선택제 정규직으로 근무하기 시작한 그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하루 4시간만 일해 아이를 돌볼 수 있다는 게 최대 장점”이라고 말했다. 》
최근 대기업, 공기업 등에서 시간선택제 일자리 채용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들이 내놓은 일자리들은 고용안정성, 처우, 일자리의 질(質) 면에서 이전의 시간제 일자리와 완전히 차별화된다.
○ 경단녀들,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잡다”
28일 고용노동부와 산업계에 따르면 시간선택제 일자리에 취업한 사람은 8월 말 현재 740여 개 기업에 4200여 명으로 추산됐다. 지난해 말 2100여 명(590개 기업)의 두 배 수준이다. 올해 들어 CJ그룹의 CJ제일제당 CJ오쇼핑 CJ푸드빌 등 10개 계열사와 신세계그룹의 이마트 스타벅스코리아, SK그룹의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 IBK기업은행 등이 잇달아 시간선택제 채용을 한 영향이 크다.
늘어나는 시간선택제 일자리의 가장 큰 수혜자는 단연 ‘워킹맘’들이다. SK텔레콤 콜센터에서 일하는 박성근 상담사(36·여)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오전 8시 남편을 출근시킨 뒤 오전 10시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다. 청소와 설거지를 마치면 오전 10시 반. 11시 반쯤 콜센터에 출근해 일하다가 오후 3시 반에 퇴근한다. 퇴근길에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가족을 위한 하루’를 다시 시작한다.
박 상담사의 월급은 전일제 직원의 60%지만 불만은 없다. 그는 “전일제로 일하는 또래 워킹맘들 중에는 몸은 사무실에 있어도 마음은 집에 가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면서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만 일하니까 일과 가정에 모두 충실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 은퇴자 활력 찾아 주는 시간선택제 일자리
은퇴자들에게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경제적 안정성과 생활의 활력을 얻는 좋은 기회다.
올해 6월 대형마트에서 퇴직한 김옥란 씨(55·여)도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통해 삶의 여유를 되찾았다. 대형마트와 백화점에서 일한 20년간 그에게 일상은 항상 빠듯함 그 자체였다. 매일 8시간씩 일한 뒤 집에서는 녹초가 됐다. 경제적인 면을 걱정하면서도 내심 퇴직이 기다려졌던 이유다. 김 씨는 퇴직과 동시에 대형마트인 이마트가 시간선택제 일자리로 계산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지원해 재취업했다.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2시에 퇴근하는 그는 “예전에는 꿈도 못 꿨던 친구들 모임에도 가고, 등산도 다닌다”면서 “지금 내 삶에서 이 일자리는 너무나 소중하다”라고 말했다.
박동관 씨(78)는 올해 3월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실버사원’으로 재취업에 성공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하얀마을 6단지 1400여 채를 관리하는 게 그의 임무다. 1997년 공기업 임원을 끝으로 퇴직한 뒤 몇 년 동안 박 씨는 여유 있게 인생을 즐겼다. 지인들이 “와서 일해 달라”는 제안을 했지만 대부분 예전 직장의 이름을 팔아 영업을 하거나, 회사 후배들에게 청탁을 해야 하는 자리여서 거절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결국 박 씨가 선택한 일자리가 공기업인 LH의 실버사원이다.
박 씨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4시간 근무하고 퇴근한 뒤에는 고문서를 공부하고 서예를 즐긴다. 고령자 대상 일자리여서 월급은 55만 원으로 많지 않은 편. 하지만 박 씨는 “일과 취미를 즐기느라 젊었을 때보다도 더 바쁘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즐거워 살맛이 난다”라며 만족스러워했다.
○ 기업들, 시간제 일자리가 ‘득’
많은 기업들이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늘릴 경우 ‘간접 인건비’가 상승할 것을 걱정하지만 시간선택제 인력을 채용한 기업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기대한 것 이상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결혼, 출산 때문에 직장을 떠난 경력 단절 여성들 중에 학력, 실력, 업무에 대한 열정 면에서 경쟁력이 높은 여성들이 많아 오히려 적은 비용으로 우수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라는 반응이다.
올해 8월 CJ그룹이 경력 단절 여성 인턴 150여 명을 모집했을 때 지원한 2530명 중 9.5%인 240여 명은 석사 이상 학위 보유자였다. 약사, 수의사 지원자들이 끼어 있었고 영어, 중국어는 물론이고 베트남어, 스페인어, 인도네시아어 등에 능통한 인력도 적지 않았다. CJ그룹 관계자는 “집에서 살림만 하기엔 아까운 인력들이 다수 몰려와서 회사도 깜짝 놀랐다”면서 “인력의 우수성 등을 고려해 앞으로 더 많은 경력 단절 여성들을 시간선택제로 채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특정 시간대에 많은 업무가 몰리는 기업에 특히 도움이 된다. 인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해 고객에 대한 서비스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어서다.
삼성전자의 협력사인 ‘청명환경시스템’은 지난해부터 전체 직원의 약 20%인 22명을 시간선택제 근로자로 채용했다. 삼성전자 공장의 기계 설비와 필터 교체, 배관 보수 등을 맡고 있는 이 회사가 시간선택제 일자리로 눈을 돌린 것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 사이에 대부분의 업무가 몰리기 때문이다.
청명환경시스템 관계자는 “전일제 직원으로 모든 인력을 충원하면 업무가 없는 시간에는 인력을 놀려야 했다”면서 “시간선택제 일자리로 인력 수요가 높은 시간에만 인력을 채용했고 덕분에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IBK기업은행이나 SK텔레콤도 고객의 전화가 집중적으로 몰리는 점심시간 전후에 시간선택제 근로자를 배치함으로써 고객의 대기시간을 줄여 상담 서비스의 질을 끌어올리고 있다.
〈특별취재팀〉
▽팀장 박중현 소비자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소비자경제부 김현진 김유영 기자 ▽경제부 박재명 기자 ▽사회부 이성호 김재영 기자 ▽국제부 전승훈 파리 특파원, 박형준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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