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3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가 시작되자마자 “한 해가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여전히 과거의 정치적 이슈에 묶여 시급한 국정 현안들이 해결되지 못해 참으로 안타깝다”며 2분 동안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 문제 등 국정 현안에 대한 말을 쏟아냈다. 박 대통령은 9월 16일 여야대표와의 3자 회동 후 한 달여 동안 국정원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켜왔다. 현안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하면 계속 정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는 것. 그러나 2일 서유럽 순방을 떠나기 전 이번 논란에 대한 입장 정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 재·보선 승리 자신감?
박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정홍원 국무총리가 대국민 담화를 할 때까지만 해도 국정원 문제를 직접 언급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이 수사를 해야 할 문제에 정치권이 개입하는 것도 못마땅한 마당에 대통령까지 나서는 건 적절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방 전 대통령이 직접 정리해야 한다는 새누리당의 요구가 이어졌고 참모진 사이에서도 대통령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질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박 대통령도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과 관련해 새로운 의혹이 터져 나오는 시기는 지났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10·30 재·보궐선거 결과도 박 대통령의 발언에 영향을 줬을 거라는 관측이 나온다. 예상 밖의 압승으로 민주당의 공세는 주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정쟁보다 민생을 앞세운 대통령의 논리가 국민에게 더 각인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오늘 회의 때 재·보선 결과에 대해 누구도 말은 안 했지만 선거 결과가 국정원 개입 의혹을 들고 나온 민주당보다 민생을 우선하겠다는 대통령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며 “앞으로 대통령은 경제살리기와 민생 챙기기에 매진하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 “선거중립 엄중히 지켜낼 것” 다짐
박 대통령은 “의혹을 밝히고 책임을 묻겠다”던 정 총리의 발언에서 한발 더 나가 “앞으로 개별 공무원도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엄중히 지켜나갈 것이고 내년도 지방선거 때 선거 문화를 끌어올리겠다”는 새로운 다짐까지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기왕 언급하기로 결정한 이상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국민에게 전하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의혹을 살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라는 전제를 달아 ‘국정원에 빚진 게 없다’는 태도를 지켰다. 그러나 직원 개인이 한 일인지,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일인지 밝혀지기 전까지 언급하지 않겠다던 자세에서 벗어나 직원 개인이 했더라도 문제가 되면 책임을 묻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박 대통령은 법안 처리를 위해 국회 설득에 나서라고 국무위원들을 독려했다. 박 대통령은 최근 회의 때마다 경제활성화 법안을 처리하지 않는 정치권을 비판해왔다. 그러나 이날은 “국무위원들이 직접 국회를 설득하는 노력을 강화하라”며 내각에 숙제를 내줬다. 또 “국정감사에서 제기된 합리적인 지적이나 비판은 국민의 목소리로 생각하고 정책에 적극 반영하라”며 국회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를 취했다.
○ 민주주의 5번 언급
박 대통령은 이날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5번이나 사용하며 “정치를 시작한 이후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고 정당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왔다”며 “지금도 그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민주당의 공격을 강하게 반박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성숙된 민주주의를 형성해 나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법을 지키는 일이며 사법부의 독립과 판단이 중요하다”면서 “사법부의 판단을 정치적인 의도로 끌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건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당 아니냐는 취지다.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민주당은 “대통령이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배재정 민주당 대변인은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과 군 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고용노동부의 선거개입이 모두 과거의 일인가”라며 “여당을 ‘무릎 위 고양이’로 만들고, 야당의 요구를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민주주의이고, 정당 민주화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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