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하(45)는 언뜻 보면 ‘가질 것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작가다. 첫 단행본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화려한 조명을 받은 이후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두루 받아왔다. 굵직한 문학상을 휩쓸었고 해외 번역 출판도 이어졌다. 라디오 진행, 줄 잇는 강연 요청, 국립교육기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까지…. 한국을 떠나 세계를 주유하며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그가 최근 뉴욕타임스(NYT) 국제판(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고정 칼럼니스트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보고 싶었다. 그의 눈으로 본 한국, 한국 문학은 어떤 것일까.
최근 부산에 터를 잡았다는 그를 서울에 다니러 온 지난달 30일 만났다. 스트라이프 셔츠와 면바지, 운동화까지 푸른 톤으로 맞춘, 편안하면서도 맵시 있는 차림새였다.
가르침에 대한 확신없어 교수 포기
―NYT 첫 칼럼으로 ‘CEO가 주술에 빠질 때’란 제목으로, 최태원 SK 회장의 점쟁이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의 횡령 사건을 썼다. 한국 기업을 깎아내리려는 의도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대기업 CEO가 점쟁이의 의견을 듣고 공금을 횡령하는 과정에서 누구도 그를 막지 않았다는 것, 재벌의 지배구조 문제를 짚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NYT 편집장은 그것을 ‘문제’라기보다 글로벌 한국기업의 CEO가 주술에 귀를 기울인다는 걸 ‘흥미’로워 하더라. 어떻든 이제 한국 기업은 글로벌 기업이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관리에 급급한 때는 지났다고 본다.”
그는 NYT 칼럼 집필에 대해 “신기한 경험”이라고 했다.
―무슨 뜻인가.
“한글로 보내는 한 회 원고량이 원고지 15장 정도다. 쓰는 데 들이는 시간보다 원고를 보낸 뒤에 시간이 더 들어간다. 편집장이 ‘그렇다’고 써야 할지, ‘그렇게 알려져 있다’고 써야 할지, 혹은 아예 그런 투의 단어를 쓰지 말아야 할지 같은 질문에서부터 ‘이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앞뒤 단락 순서를 바꾸면 어떨까’ 등 정말 많은 의견을 보내온다. 그런 훈련을 받은 적이 없어서 처음엔 낯설었다. 내가 어련히 잘 알아서 썼을까 기분도 상했다. 하지만 매체 영향력이나 법적인 문제 같은 걸 고려해서 꼼꼼하게 확인하는 절차였다. 주제도, 안에서 보기엔 별것 아닌데 바깥에서 보는 눈으로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는 걸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그는 2008년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는 남들 보기엔 안정적으로 보이는 교수직을 반납하고 이탈리아 시칠리아, 캐나다 밴쿠버, 미국 뉴욕으로 옮겨 다녔다.
―정년이 보장된 국립교육기관 교수를 그만뒀다.
“2년 반 정도 했는데 견디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가르치는 일이 맞지 않았다. 가르치려면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었다. 내가 가르치면 학생들 글쓰기 수준이 올라가고, 그래서 좋은 작가로서 필요한 자질을 키워준다는 확신 말이다. 나는, 작가가 되려면 ‘독특한 인간’이 돼야 한다고 믿는 쪽이다. 문장력 같은 건 나중에 따라온다. 이런 내가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나. 학생들이 제출하는 작품이란 게 말하자면 초고인데, 이걸로 A, B, C (학점을) 매긴다는 게…. 작가인 나도 초고를 계속 만지면서, 안개를 헤쳐가면서 숲을 나아가는데 말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마감을 지킬 것. ‘백업’하라는 것.”
내 맘대로 살고싶어 작가의 길로
―‘백업’이라니….
“장편 쓰다 (원고가) 날아가 봐라. 반드시 클라우드에 백업해놔야 한다(이 대목에서 기자도 작가도 함께 웃었다). 아, 타이핑 속도도 빨라야 한다. 타이핑이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생각의) 흐름이 끊기니까.”
그러고 보니 그도 본래부터 작가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연세대 경영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친 경영학도다.
“나 역시 처음부터 ‘이 길이다’ 생각하고 온 사람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이 길로 온 거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마음 가는 대로 살겠다고 생각하니 편해지고, 오랫동안 눌러왔던 스프링이 팍! 튕겨나간 것처럼 밖으로 나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독자들에게 잊혀질 수 있다는 불안은 없었는지….
“내가 뉴욕에 있는 동안 시작한 게 있다. 팟캐스트다. 처음 접하곤 금세 뚝딱 만들겠다 싶어 바로 맥북을 샀다. 아이폰이 퍼지면서 팟캐스트도 확산되고, ‘나꼼수’로 대중화가 되고. 한때는 한 회당 내 팟캐스트 다운로드 수가 10만 회가 되더라. 이런 방식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사람들과 가깝게 있다고 느꼈다. 뉴미디어로 이렇게 위안을 받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보니 본격 문학 작가들의 단행본 출간 주기가 9, 10년이더라. 독자들은 그걸 기다려주고. 그래서 나도 믿고 가보자고 생각했다. 결국 작품만 좋으면 독자들은 찾을 거라고. 작품은 늘 쓰고 있었으니까.”
그는 ‘새로운 것’에 예민하다. 1997년 낸 단편집 ‘호출’에서 삐삐를 소재로 삼은 이래 2006년 장편 ‘빛의 제국’에서 e메일과 트위터를 소개하는 등 누구보다 앞서서 작품에 새로운 매체를 등장시켰다. 그 자신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이용한 작가다. 그런 그가 자리 잡은 곳이 바다가 보이는 해운대다.
―부산을 택한 이유는….
“서울이 앞서가는 건 맞다. 그런데 내 눈엔 서울의 진부한 모습이 보인다. 곳곳이 저마다 닮고자 하는 데가 있다고 할까. 홍대는 시부야, 강남은 뉴욕,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지방이 더 흥미롭다. 원형이 남아 있다는 느낌? 부산 사람들은 철을 따라 산다. 봄 되면 도다리 먹고 가을 되면 전어 먹어야 되고. 내가 한국 작가로서 파고들어야 할 부분은 서울이 아니라 지방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 주거비도 싸고.”
―지난여름 나온 ‘살인자의 기억법’의 반응이 좋다(출간 3개월 만에 7만5000부를 찍었다).
“내가 베스트셀러를 낸 적이 없다. 그런데 나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웃음). ‘살인자의 기억법’은 내가 낸 책 중 제일 많이 팔렸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나온 게 17년 됐는데, 그거 17년 팔린 것보다 더 많이 팔렸다. 짧게 손 풀고 간다는 생각으로 썼는데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다.”
그는 “소설에 부산 영향이 많이 배어 있다. 부산 남자들이 말이 짧다. ‘가스나야!’ 툭 던지고 마는 한마디도 시적으로 들린다. 예전 소설과 비교해 보면 문장이 짧아지지 않았냐”고 되묻기도 했다.
세계적 작가? 더이상 꿈 안꿔
김영하는 일찍이 국제무대에 눈을 돌린 작가다. 한국문학의 해외 출판이 한국문학번역원이나 대산문화재단 같은 번역기관에 의존하고 있을 때 해외 출판사와 직거래할 수 있는 에이전시를 번역 루트로 삼았다. 한국 문학이 유럽 출판에 치중할 때 미국 출판계를 뚫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번에 NYT 칼럼니스트가 된 계기도 그의 책이 출간된 미국의 대형 출판사 휴트 미플린 하코트로 NYT 부편집장이 연락을 해오면서다.
―글로벌 작가가 되겠다는 야심이 컸던 것 같다.
“1998년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프랑스어판으로 나왔다. 어린 마음에 세계적인 작가가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2006년까지 아무 소식이 없었다(웃음). 그 한 해 전(2005년)에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 참가했는데, 수백 개 테이블에서 에이전시와 출판인들이 쉴 새 없이 미팅을 하는 걸 봤다. 전 세계의 책이라는 게 이렇게 거래되는 거구나, 왜 한국의 책은 이렇게 할 수 없는가. 그래서 에이전트를 구하게 됐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이제는 ‘세계적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
“해외 행사에 가면 번역자, 출판사, 평론가, 청중을 만난다. 그들의 모국어로 내 책에 대해서 얘길 한다. 나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른다. 번역 출판된 책의 저자라는 건 유일한 이방인인 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해외 출판계를 경험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들을 실제로 많이 만나기도 했는데, 나도 그런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가는 불행해지기 쉽겠더라.”
―왜 그런가.
“내 뜻대로 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돼서다. 한국에서는 어떠어떠한 소설을 쓰겠다 하는 게 내가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세계적인 작가가 되겠다는 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하고, 그 결과로 좋은 게 오면 좋은 거고.”
내게 문학은… 잠수함
―문학의 전망은 계속 어두워진다.
“요즘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을 자주 생각한다. 배가 가라앉을 때까지 연주를 멈추지 않던 현악 4중주단 말이다. 곧 침몰할 배인데 왜 그들은 연주를 계속했을까? 연주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할 일이 그것밖에 없었던 거다. 발을 빼기엔 너무 깊이 들여놨고, (문학계에서) 나만큼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고. 나 같은 사람이 남아서 현악 4중주를 연주해야겠지. 사실 문학 출판계에 오랜 시간이 남아 있다거나 큰 희망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솔직히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유니크한, 대체 불가능한 경험을 제공하는 문학의 형식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를 소설로 읽는 것과 영화로 보는 건 다르다. 수동면도기, 라디오를 생각해보라. 전자동면도기, TV, 스마트폰이 나와도 살아남는다. 책도 문학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한다. 단지 시간이라는 희소한 자원을 두고 싸우는 과정에서 ‘졌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자는 문득 ‘신문의 위기’가 말해지는 세상에서 신문기자로 사는 것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참, 인터뷰를 마쳐야 할 시간이다.
―당신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
“음… 잠수함? 그걸 타면 나를 저 깊은 곳에, 평소에 갈 수 없었던 곳으로 데려다주는 것. 작가는 사람들이 하지 않아도 될 상상을 하고, 그 수압을 견디고 내려가서 사람들이 보려 하지 않거나 보지 못하는 걸 전해주는 거다. 가끔 술자리에 나가서 수다를 떨다가도 문득 생각한다. 아 저 깊은 곳에서 인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가서 ‘시작하자!’ 그래야 움직이는데. 때때로 내가 별것 아닌 존재처럼 느껴질 때 저 아래서 날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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