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워커스’(Walkers)다. 새로 나온 신발 브랜드가 아니라 학교 이름이다. 사람들 눈에는 내가 특이하게 보이는가 보다. 학교는 전통시장 한가운데 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망원시장. 시장 입구에서 철물점, 옷가게, 반찬가게를 지나면 수산물 가게가 나온다. 가게 3층이 학교다. 약 100m²의 공간에 교실 하나와 이에 딸린 사무실이 전부다. 학생들이 세상의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시장으로 들어왔다.
이름-나이만 물어보는 입학전형
올해 8월 1기 학생 20명이 입학했다. 19세부터 35세까지 다양하다. 지원서에는 이름과 생년월일 말고는 어떤 ‘스펙’도 적지 않았다. 학생들은 서로 출신 학교를 모른다. 이름도 가명을 쓴다. 대신 얼마나 실패를 많이 했나, 책은 몇 권이나 읽었나 같은 이른바 ‘인생 마일리지’와 창의력 테스트, 심층면접으로 학생을 뽑았다. 5개월 과정. 학비는 없다. 도대체 어떤 학교인지 궁금하다고?
먼저 우리 학생들을 소개한다. 워커스의 왕 언니인 35세 ‘꿈걸’은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학년 두 딸을 둔 싱글 맘이다.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다니던 배우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그의 삶을 바꿨다. 생계를 책임지던 엄마의 해장국집이 어려워졌다. 그때 만난 직업군인이 프러포즈를 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엄마에게 “입 하나 더는 셈 치고 시집이나 가겠다”고 했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에게 빚이 있다는 걸 알았다. 1억8000만 원. 남편은 게임에 빠져 밥도 안 먹고 컴퓨터에 매달렸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캐피탈입니다. 남편이 부인을 연대보증인으로 세우셔서요.”
이혼하고 남편 빚을 갚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 공사장 ‘함바집’에서 하루 종일 밥하고, 대형마트에서 행사도우미로 휴지를 팔았다. ‘이렇게 살면 아이들 대학도 못 보내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지방대에 웹디자인 전공으로 편입해 올해 2월 졸업했다.
강원 강릉시의 작은 회사에 어렵게 취직했다. 회사는 자정을 넘긴 새벽 2시까지 일을 시켰다. 아이들 밥을 차려주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일이 잦았다. 결국 회사는 불법적인 일을 시키더니, 이걸 문제 삼아 해고했다. ‘아, 이제 애들은 어떻게 키우지?’
그때 워커스가 문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엔 의문이 많았다. “여길 나오면 정말 취직이 될까.” “아이 둘 딸린 여자가 취직이 될까.”
하지만 이제 꿈걸은 본인의 역량이 커진 걸 느낀다. 싱글 맘에게도 기회가 올 것으로 믿는다. 계란으로 바위를 한번 깨뜨려 보려고 한다. 그래서 강릉에 두고 온 두 딸이 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하지만 꾹 참는다.
30세 ‘한표’는 서울 4년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졸업하고 호주로 날아가 광고회사에서 6개월간 인턴으로 일했다. 하지만 외국인 정식 채용은 어려운 일이었다. 귀국해 취업 원서를 200번 썼으나 면접 기회는 2번뿐이었다. ‘학점과 영어점수가 나쁘지 않은데 왜 면접도 볼 수 없나’라는 자괴감만 들었다. 그는 워커스에서 실력을 쌓아 열리지 않는 취업문을 다시 두드리려고 한다.
22세 ‘엘레강스’의 꿈은 작가다. 고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해 올해 4월 전역했다. 제대 뒤에는 밴드를 결성해 보컬을 맡았다. 그의 롤 모델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도 재즈 카페를 운영하다 데뷔한 늦깎이 소설가다. 영화 음악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그는 이곳에서 예술가가 될 꿈을 꾸고 있다.
학교의 막내 19세 ‘뽀또’도 대학에 미련이 없다. 고교 시절 성적이 좋았지만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언니와 오빠가 4년제 대학을 나오고도 취업이 안 되는 걸 보고난 뒤 내린 결정이다. 그는 영화나 뮤직비디오 감독이 되고 싶다.
창의력 승부 거는 스펙 낙오자들
우리 학생들은 요즘 세상의 눈으로 보면 낙오자들이다. 학점 토익점수 학벌 같은 취업에 중요한 스펙으로만 보면 그렇다. 하지만 이들은 스펙 대신 창의력으로 승부를 건다. 모든 학생은 팀을 이뤄 공부하며 헌신과 협동의 정신을 배운다. 세상의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은 경쟁보다는 서로 끌어주며 집단 지성으로 창의력을 키우고 있다.
학교 교육철학은 ‘창의력은 훈련에서 나온다’이다. 학생들은 일주일에 두 번 등교한다.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3시부터 오후 10시가 넘도록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지난달 31일에는 ‘그레이트 셀러(great seller) 프로그램’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4명씩 5개 조가 ‘세상에는 없는 상품’을 개발하고 마케팅 전략을 설명했다.
1조는 피부에 수분을 공급해주는 상품을 선보였다. 2조는 물건을 잘 떨어뜨리는 여성들을 위해 실리콘 재질의 물건 보호대를, 3조는 고양이 애호가들이 반길 고양이털 자동 다듬기를 들고 나왔다. 아이디어는 물론 생산 원가와 판매 전략까지 치밀하게 계산한 발표가 이어졌다. 발표 내용을 더 공개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학생들의 아이디어는 모두 상품화가 가능한 것들이다. 아이디어를 빼앗길 우려가 있다.
매일 두세 시간씩 걸으며 세상 관찰
주요 교육 프로그램 중 하나는 ‘워크 앤드 캐치(walk and catch)’다. 철학자 니체는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걷기에서 나온다고 했다. 뉴턴도 산책 중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걷기가 창의력의 어머니다. 매일 최소 두세 시간 이상 걸으며 사람과 사물을 관찰하는 프로그램이다. 인터넷을 뒤져 얻는 정보는 내 것이 아니다. 발품을 팔아야 세상이 보인다. 걸으며 발견한 사람과 사물은 매일 학교 홈페이지에 올린다.
올린 글을 살짝 볼까. 학생 아큼은 3일 홈페이지에 ‘소셜 무인도’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가 발견한 사람은 37세 커뮤니케이션학과 대학교수. 이 사람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지쳐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1년 전 동료 교수의 권유로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시작해 하루 6시간 이상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정도로 중독됐다. 교수는 모르는 사람과의 온라인 인맥, 원치 않지만 쏟아지는 부탁들, 시도 때도 없는 사생활 침해에 시달리다 두 달 전 신경성위염으로 입원했다. 교수는 스마트폰을 처분하고 구식 휴대전화로 바꿨다. 아큼은 ‘SNS라는 대륙을 떠나 소셜 무인도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감상을 덧붙였다.
시니는 ‘밥 주는 영화관’을 발견했다. 조조영화는 가격이 싸지만, 일찍 일어나 밥까지 먹고 나서는 보기 힘들다. 그래서 서울 강남의 한 영화관에서는 1만 원에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는 조조영화를 도입했다. 관객의 호응이 좋다. 시니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고객을 늘린 영화관에 주목했다.
“인생은 시련 통해 살찌는 것”
학생들이 보고, 듣고, 토론한 모든 내용은 홈페이지에 오른다. 홈페이지는 나를 후원하는 SK플래닛, 이노션월드와이드 같은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이 언제든 볼 수 있다. 학생들은 다음 달 모든 과정을 마치면 후원기업에 지원할 기회를 갖는다. 취업에 성공한 학생들은 2기 후배들을 위해 500만 원을 기부할 예정이다. 선배들이 낸 후원금으로 후배들이 다시 꿈을 키우는 재활의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이런 취지에 공감한 저명인사들이 특강을 한다. 영화 ‘국가대표’ ‘미녀는 괴로워’ ‘미스터 고’를 연출한 김용화 감독은 10월 21일 굴곡진 인생담을 털어봤다. 김 감독은 20대에 부모를 모두 여의었고, 병간호를 위해 대학을 7년간 휴학했다. 워커스가 수산물 가게 3층에 있는 걸 보고는 생선가게에서 일한 경험도 들려줬다. 그는 “쓸모없는 고통은 없다. 내 작품에도 인생의 고통이 녹아있다. 마음에 간직한 인생의 아픔을 창작으로 승화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어린이 애니메이션 ‘뽀로로’의 제작사 아이코닉스의 최종일 대표도 찾아왔고, SM엔터테인먼트 한세민 이사와 사진작가 강영호 씨도 특강을 할 예정이다.
학교 교육은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출신인 조동원 대표 멘토와 강수현 대표가 맡는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입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만든 조 멘토는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새누리당 홍보본부장을 맡아 빨간색 당 로고를 새로 만들었다.
강 대표는 말한다. “스펙이 없어도 능력과 아이디어만 있으면 얼마든지 취업과 창업이 가능하다는 게 학교를 만든 취지다. 인생은 실패를 통해 살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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