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하이옌(海燕)’이 할퀴고 지나가 폐허로 변한 대재앙의 현장에 구호단체 관계자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구호작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재난 발생 4일째에 접어든 피해 지역은 방치된 시신이 부패하면서 악취가 진동하고 배고픔에 견디다 못한 이재민들이 곳곳에서 약탈에 나서 치안마저 불안해져 ‘살아남은 자’에게도 ‘죽은 자’ 못지않게 생지옥이 돼 가고 있다.
○ 참혹한 재난의 현장
태풍이 지나간 지 사흘째인 11일 타클로반에는 상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AP통신 등 외신이 전했다. 언덕 위 야자나무는 모조리 드러누웠고 도시의 95%가 파괴된 시내의 도로 곳곳은 쓰레기에 막혔다. 납작하게 무너져내린 집 잔해 속에서 수습된 셀 수 없이 많은 시신은 천에 덮인 채 길가에 방치돼 있었다. 섭씨 30도를 넘는 기온과 높은 습도 때문에 시신이 빠르게 부패되면서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차량 몇 대가 시내를 돌면서 시신을 수습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신이 새로 발굴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확한 사망자 집계를 내기도 어려운 실정이고 생존자들은 가족의 시신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당장 마실 물도,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은 쓰레기더미를 뒤졌다. 11일 타클로반 공항이 열려 2, 3편의 수송기가 운항됐지만 22만여 명의 주민이 살았던 이곳의 상황에 비하면 구호품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쓰레기가 길을 막아 물자 공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은행이나 슈퍼마켓을 약탈하는 행위가 계속되는 등 치안 상황도 최악이다. 타클로반으로 들어오던 구호품 수송 트럭이 약탈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주민들이 총기를 들고 직접 자신들이 살았던 마을의 폐허를 지키는 곳도 있다고 미국 CNN방송은 전했다.
타클로반의 병원 대부분은 전기가 끊기고 의료물자도 없어 간단한 응급조치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 부상자 중 어린이가 많아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현지 구호단체 관계자들은 사망자의 40% 정도가 어린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태풍이 오기 전 타클로반 주민 등 80여만 명에게 대피령을 내렸지만 학교 등 대피소도 피난처 역할을 해주지 못할 만큼 태풍이 강력해 피해가 늘었다고 외신은 전했다. 또 태풍 예고 후에도 집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집에 남았던 한 명씩의 가족 대부분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타클로반에서 구호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반면 태풍이 처음 닥친 것으로 알려진 이웃 섬 사마르 주의 인구 4만 명 도시 기우안은 피해 상황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기우안 시내 모습은 타클로반 못지않게 폐허로 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사망자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 정부는 11일 레이테 주 등 41개 주, 7251개 지역에서 필리핀 전체 인구 1억 명의 약 10%인 965만여 명이 태풍 피해를 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밝혔다. 또 태풍으로 1만3400여 채의 가옥이 무너지고 9700여 채의 가옥이 부분 파손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 국제사회 구조와 구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0일 성명을 통해 “태풍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필리핀 국민에게 위로의 뜻을 전한다”며 “그렇지만 필리핀 국민의 놀라운 회복력을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바야니한(공동체 의식을 뜻하는 타갈로그어)’ 정신으로 이 비극을 극복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미군 태평양군사령부는 이날 척 헤이글 국방장관의 지시에 따라 필리핀 중남부에 해병대원과 해군 장병을 파견해 실종자 수색 및 구조작업에 본격 돌입했다고 밝혔다. 90명으로 구성된 제2해병원정여단 선발대가 KC-130J 허큘리스 수송기편으로 일본 오키나와 기지를 떠나 필리핀으로 향했으며 해군 P-3 오라이언 초계기도 필리핀 상공에 급파됐다.
일본 정부는 의사, 간호사, 약사 등 의료요원 25명을 11일 필리핀에 파견했다. 캐나다 정부는 필리핀에 500만 달러의 긴급 구호기금을 제공하고 국내 민간 구호단체가 조성하는 성금에 매칭펀드 방식으로 별도의 정부 기금을 보태기로 했다.
베트남은 피해 지역에 10만 달러의 긴급 구호기금을 제공하기로 했다. 리셴룽(李顯龍) 싱가포르 총리는 4만 달러 상당을 지원하고 타클로반 등 주요 피해 지역에 병력을 파견해 유엔 구호활동을 돕겠다고 밝혔다.
유럽에서는 영국 600만 파운드(960만 달러), 독일 50만 유로(66만 달러), 노르웨이 2000만 크로네(325만 달러) 등의 구호자금 지원이 잇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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