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2월 권율이 이끄는 1만의 조선군이 행주나루를 건넜다. 감개무량한 도하였다. 임진왜란 발발로 한 달 만에 수도를 빼앗기고 선조는 의주로 피란한 지 약 1년 만이었다. 그러나 아직 조선군은 단독으로 한양을 탈환할 능력은 되지 못했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평양에서 남진하고 있는 명나라 군대였다. 명군이 한양에 있는 왜군을 몰아내면 권율의 조선군은 탈출로를 봉쇄하고 왜군을 요격할 계획이었다.
원래 권율은 한강 남쪽에서 대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적을 소탕해야 한다는 마음에 나루를 건너 강북으로 들어왔다. 자신감에 넘친 권율은 아예 무악재까지 진군해서 주둔하려고 했지만 부하들의 만류로 중단했다. 그 대신 행주나루 옆의 작은 야산에 병사를 주둔시켰다. 오래된 토성이 있었지만 지형을 깎아낸 흔적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성벽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군대는 하루를 머물러도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해 쉬는 법이다. 그게 군사학의 철칙이다. 하지만 권율은 다가올 결전을 대비해 병사들을 쉬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부하 참모 몇 명이 군사학 원칙을 들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권율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이 생겨 잠시 어디를 다녀오게 됐다.
권율이 없는 틈을 타서 조방장(助防將) 조경이 무단으로 공사를 강행했다. 토성은 축대와 같은 구조여서 땅이 계단형으로 깎여 있을 뿐 엄폐물이 전혀 없었다. 조경은 이중으로 목책을 세우고 목책 뒤로 참호까지 팠다. 이 공사를 단기간에 마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틀 동안 공사를 강행했다. 권율은 돌아와서 이 모습을 보고 화를 냈지만 금세 무안하게 돼버렸다. 공사를 끝내자마자 왜군 3만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은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맞서 싸웠다. 심지어 승병대는 참호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지른 후 그 불을 건너뛰어 왜군에게 돌격하기까지 했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 행주대첩은 이처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조선군의 승리로 기록됐다.
눈여겨볼 점은 행주산성 전투의 결정적 승인이 목책 공사를 강행한 조경의 명령 불복종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점이다. 조경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경상도에서 여러 번 왜군과 싸워서 당시로서는 실전 경험이 제일 많은 장수였다. 수차례 전투를 겪으면서 그는 무엇보다도 기본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던 것 같다. 만약 목책이 없었다면 조선군이 왜군의 파상공세에 맞서 그토록 잘 싸웠을 리 만무하다. 실제로 조경은 행주산성의 전공으로 임란 후 공신으로 책봉됐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접하게 되면 흔히 “알고 보니 권율은 공이 없고 진짜 공로자는 조경이잖아”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경이 소신을 가지고 지휘관의 명령조차도 어길 수 있었던 것은 권율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합리적인 지휘관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권율은 문관 출신이고 군사경력이 전혀 없는데도 임진왜란이 터지자 중요한 승리를 이끌어 냈다. 선조와 국정을 아는 대신들은 권율을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언제나 권율 휘하에는 조경 같은 유능한 장수들이 있었고 아랫사람들은 권율을 신뢰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군사의 문외한인 그가 최고 무장들을 지휘해서 승리를 얻어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리더였음을 잘 보여준다.
리더가 언제나 옳은 결정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리더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면 참모와 부하들이 리더의 실수를 바로잡아줄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리더의 사명은 자기 능력의 극대화가 아니라 조직원 전체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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