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MB5년]<33>올드보이 스타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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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 본인에게 반기 든 김원용에게 “자리 하나 줘야겠어”

2008년 4월 2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18대 총선 당선자 환영 만찬. 이명박(MB) 대통령 부
부와 이상득(SD) 의원 부부가 모처럼 ‘가족 사진’을
찍었다. SD는 언젠가 자신의 자원외교 활동을 소개
하면서 “우리 대통령은 한 번도 못 만나고 남의 나라
대통령만 자주 만난다”고 했다. 대통령을 만나지 못
해도 정권을 운영할 수 있는 힘, 그게 바로 ‘영일대
군’의 권력이었다. 동아일보DB
2008년 4월 2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18대 총선 당선자 환영 만찬. 이명박(MB) 대통령 부 부와 이상득(SD) 의원 부부가 모처럼 ‘가족 사진’을 찍었다. SD는 언젠가 자신의 자원외교 활동을 소개 하면서 “우리 대통령은 한 번도 못 만나고 남의 나라 대통령만 자주 만난다”고 했다. 대통령을 만나지 못 해도 정권을 운영할 수 있는 힘, 그게 바로 ‘영일대 군’의 권력이었다. 동아일보DB
이상득=“(몹시 흥분한 어조로) 강 장관은 알고 있었지? 정두언이야?”

강만수=“아닙니다. 김용태입니다.”

이상득=“김원용이 배후라던데…. 그 ×× 강 장관이 데리고 왔다며?”

강만수=“예, 맞습니다. 한번 만나보시죠.”

이상득=“김원용이 자리 하나 만들어 줘야겠어.”

강만수=“그 친구는 그런 욕심은 없는 사람입니다.”

2008년 18대 총선 직전 정두언 의원을 비롯한 한나라당 총선 출마자 55인이 대통령 친형의 공천 및 국정 개입을 규탄하며 이상득(SD) 국회부의장의 불출마를 종용하는 이른바 ‘55인의 선상 반란’을 일으켰을 때, SD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부터 다그쳤다. 그것도 몇 차례에 걸쳐….

‘왜 기재부 장관한테 당내 사정을?’ 그렇게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친이(친이명박)계 내 YB(Young Boys)와 OB(Old Boys)의 1차전이라고 할 수 있는 ‘55인 선상 반란’의 주역은 사실 정두언이 아니었다. 당시 40세의 김용태 의원(서울 양천을·18, 19대 의원)이었다.

강만수, 정두언과 함께 MB 선거를 도왔던 김원용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의 증언. “(55인 기자회견 계획은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리 집에서 얘기했습니다. 김용태가 주동이었고…. 정두언 의원은 김용태의 명분에 밀려 함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55인 회견의 성격을) 권력이 이상득, 박영준에게 넘어가는 데 대한 반발로 볼 수도 있겠지만 김용태는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김용태는 김영삼(YS) 정부 때 들어온 한나라당 내 ‘민중당 그룹’(이재오 김문수 차명진)의 막내였다. YS 시절이던 15대 총선 때 이원종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의 외곽 여론조사팀을 이끌었던 ‘김원용 광화문 팀’의 막내이기도 했다. 김원용은 강만수의 경남고 후배고….

강만수는 또 정두언을 아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강만수가 이명박 서울시의 시정개발연구원장 시절. MB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MB=“강 원장, 김원용이 삼성 스파이라며? 앞으로 그 친구 오지 못하게 해!”

강만수=“…. 그 친구는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만든 핵심인사들을 만나 선거학을 연구한 사람입니다. 삼성 스파이가 아닙니다.” 김원용은 1992년부터 삼성의 기업전략 자문역을 맡고 있었다. MB가 의심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 건 아닌 셈이다. 하지만 MB가 강만수에게 소리를 지른 건 처음이었다.

얼마 뒤 정두언이 머리를 조아렸다. “형님,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MB하고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제가 (김원용 교수에 대해) 한마디했는데 갑자기 화를 내면서 (형님한테) 전화를 건 겁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강만수는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정두언이 자기를 음해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SD가 강만수를 찾아 정두언, 김용태, 김원용 문제를 다그친 건 그런 관계 때문이었다. 그런데 SD의 문제 해결 방식은 자리를 하나 만들어 주자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올드보이 스타일’이었다. 강만수는 답답했고, 김원용은 어이가 없었다.

김원용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기자=“SD가 자리를 하나 주겠다고 했던 모양인데 왜 받지 않았나?”

김원용=“나는 김영삼 정권 때 권력의 몰락 과정을 지켜봤다. 교훈은 그 한 번이면 충분하다. 그보다 나는 국가를 변화시키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강만수 장관이나 김용태 의원은 잘 알 거다.”

김원용은 YS의 차남 현철 씨를 도운 적이 있다. SD의 권력 운용 행태에서 김현철의 그림자를 느낀 것일까? 공조직이 거버넌스(governance·국가관리)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친인척의 권력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의 결과를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2009년 1월 19일 발생한 ‘용산 참사’는 MB 정권의 또 다른 위기였다. ‘제2의 촛불’이 될 수도 있었다.

사건이 터진 직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은 3분짜리 동영상을 만들어 SD를 찾았다. 뉴라이트 출신인 신지호는 이재오 의원보다는 SD나 친이 직계인 안국포럼(MB의 대선캠프) 라인과 가까웠다. 그는 ‘용산 참사’의 성격을 전국철거민연합회(전철련)의 ‘도심 테러’에 가까운 것으로 규정하고 정면 대응을 주장했다. 하지만 갓 국회에 진출한 초선 의원일 뿐이었다.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신지호의 기억. “그런데 SD의 파워가 정말 막강하더라. 내가 사건 동영상을 3분 분량으로 편집해 보고했는데 그 자리에서 ‘선(先) 진상 규명, 후(後) 책임자 처벌’이라고 얘기하더니 바로 맹형규 원세훈 박희태 홍준표 임태희한테 전화를 넣더라. 그러고는 (당정청의 방침을) 확실하게 정리해 버리더라. 와, 정말 대단했어!”

맹형규는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원세훈은 행정안전부 장관, 박희태는 한나라당 대표, 홍준표는 원내대표, 임태희는 정책위의장이었다. SD는? 그냥 6선 의원일 뿐이었지만 ‘만사형통(萬事兄通)’의 바로 그 ‘형(兄)’이었다.

‘올드보이 스타일’은 굳건했다.

김원용의 기억. “우리는 SD 문제도 끊임없이 제기했지만 최시중 씨도 기용하면 안 된다고 건의했다. 그런데 MB는 ‘함부로 남의 욕을 하면 안 돼! 근거도 없이…’라면서 꿈쩍하지 않았다.”

김원용이 말하는 ‘우리’는 정두언, 김용태와 자기였다. 최시중은 2008년 추석을 앞두고 보좌관을 시켜 꽤 두툼한 봉투를 돌렸다. ‘정치 또한 인간관계의 하나’라는 게 최시중의 생각이었지만, 정두언이나 김용태는 최시중의 ‘올드보이 스타일’이 불편했다. 안 그래도 ‘55인 선상 반란’과 정두언의 ‘권력 사유화 발언’ 때문에 전선이 확대되고 있는 마당이었다. 정두언은 보좌관이 승용차 트렁크를 열려는 순간 돈이란 걸 직감하고 거절했다. 김용태는 아예 만나지를 않았다.

‘올드보이 스타일’의 끝은 그 어떤 정치적 퇴장보다 더 허망하다. 법과 제도보다는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10월 30일 치러진 포항남-울릉의 재선거 뒷이야기는 그런 허망함의 한 편린(片鱗)을 보여준다.

MB 정권 5년 내내 ‘SD의 대리인’으로 불렸던 이춘식 전 의원은 포항 재선거 출사표를 내면서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대선 때 친박(친박근혜)을 표명한 박명재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인지도는 높지만 노무현 정부 때 사람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아니, 그런 약점이 아니더라도 ‘친이 대 친박’의 양강 대결로 끌고 가면 승산이 없지 않다고 판단했다. 포항 현지엔 SD에 대한 동정론도 없지 않았고, ‘SD 사람들’도 남아 있었다. 한때 지지도를 17%까지 올렸다. 상승 무드였다.

중간에 서장은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도 공천 경쟁에 뛰어들었다. ‘서청원 맨’이었다. 그런데 SD의 오랜 보좌관 출신인 문성곤이 서장은을 돕고 있었다. 과거 SD를 도왔던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며 이춘식 캠프를 빠져나갔다. 상승 무드였던 지지도도 급격히 떨어졌다. 이춘식은 한순간에 ‘미아(迷兒)’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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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시한 만료로 석방돼 서울 성북구 성북동 자택에서 요양 중인 SD에게 긴급 SOS를 보냈다.

“문성곤이 서장은을 돕는 건 내 뜻이 아니야. 그런데 내가 아무리 전화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 오랫동안 데리고 일했던 보좌관 한 사람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 그게 바로 올드보이 권력의 끝이었다.

김창혁 선임기자 chang@donga.com
#MB#이상득#김원용#한나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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