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전자정부시스템 설계도 등이 한국정보사회진흥원(현 한국정보화진흥원)의 ‘제출 불가’ 의견에도 불구하고 2008년 1월 청와대로 넘어간 경위가 드러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스템 복사 및 접속 검토’ 지시가 확인된 것이다. 제출 과정의 미스터리가 어느 정도 해소된 만큼 이젠 아무런 보안장치가 없는 외장하드에 담겨 청와대로 넘어갔던 전자정부시스템 관련 자료가 어떻게 활용됐고, 외부 유출은 없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보고서 곳곳에서 ‘퇴임 후’ 언급
17일 대통령혁신관리비서관실의 ‘부처 우수시스템 조사현황 보고’ 문건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의 ‘시스템 복사 및 접속 검토’ 지시가 떨어진 것은 2007년 11월 14일이었다. 대통령 임기가 3개월 10일 남은 시점으로 당시 청와대는 노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준비에 열중하던 때였다.
대통령혁신관리비서관실 및 업무혁신비서관실과 행정자치부(현 안전행정부), 정보화진흥원 등으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가 꾸려졌고, 2007년 12월 68개 시스템 가운데 34개 전자정부시스템을 1차로 추려냈다. 이후 2008년 1월 ‘이지원 활용 가능성을 중심’으로 14개 시스템을 최종 선정했다.
TF는 최종 선정된 14개 시스템의 접근 방안에 대해 법적·기술적·경제적 검토를 진행했다. 당시 청와대가 사용하던 독립적인 문서관리 시스템인 이지원은 각 부처가 운용하는 전자정부시스템과는 연동이 되지 않았다. TF가 ‘이지원 활용 가능성’을 중심으로 14개 시스템을 최종 선정한 배경과 관련해 퇴임 후 노 전 대통령이 이지원을 통해 전자정부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 이지원 시스템을 그대로 복사해 봉하마을에 구축했다.
실제 보고서 곳곳에서는 ‘퇴임 후’가 언급됐다.
혁신관리비서관실의 1월 4일 보고서는 ‘시스템 접근방안 검토’ 항목에서 ①개별 시스템 접속 ②시스템 복사본 제작 ③매뉴얼 정리 등 3가지를 검토했다고 밝히고 있다.
①안에 대해 TF는 ‘개인정보 취급 시스템은 제도적으로 접근 불가’ ‘부처 및 청와대 시스템 보안 문제 발생 가능’ ‘퇴임 이후 활용 불가’ 등의 이유로 ‘제한적 실행 가능’ 보고를 했다. 이는 “직접 접속 방안은 기술적·제도적으로 곤란한 측면이 있는 만큼 (대통령을 위해) 특정 시간과 특정 장소에서 전자정부시스템 시연이 가능하다”는 취지였지만 사실상 완곡한 ‘실행 불가’의 의미였다. ②안에 대해서는 ‘퇴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접근·활용 가능’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시스템 복사에 따른 저작권 위반 문제 발생’ ‘경제적 비용이 과다하게 소요’ 등의 이유로 역시 ‘실행 곤란’ 의견을 보고했다.
혁신관리비서관실은 결국 “①, ②안은 어렵고 ③안대로 시스템별 매뉴얼(책자 및 파일), 데모프로그램 정리를 추진하겠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시스템 기능이 매뉴얼로 정리돼 현실감이 다소 부족하지만 연구자료로 (퇴임 후) 지속 활용이 가능하다”는 설명도 첨부됐다.
○ 보고 하루 뒤 “34개 시스템 전체 자료 제출하라”
혁신관리비서관실의 대통령 보고 다음 날인 5일 업무혁신비서관실은 2개월여 동안 TF에 참여했던 진흥원에 “시스템 전체 자료를 외장하드에 담아 제출하라”는 구두 지시를 내렸다. 제출 대상도 TF가 최종 검토했던 14개 시스템에서 다시 34개 시스템으로 늘어났다. 진흥원은 ‘제출 불가’ 의견을 제시했지만 청와대는 같은 달 8일 문재인 대통령비서실장의 직인이 찍힌 공문을 보냈다. 당시 자료를 넘긴 진흥원 관계자는 “청와대의 지시를 받고 ‘대통령 할아버지가 요구해도 줄 수 없다’고 버텼지만 정식 공문을 보내와 어쩔 수 없이 소스코드만 제외하고 나머지 자료들을 보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안전행정부의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진흥원이 제출한 자료에는 네트워크 구성도, 인터넷주소(IP), 데이터베이스(DB) 설계도, 비밀번호, 보안장비 현황 등이 담겼다.
▼ 盧 “연구 목적” 강조… 전자정부 사업에 애착 ▼ 활용 방법엔 구체적 언급 안해
노무현 정부 임기 말 청와대는 34개 전자정부시스템 자료를 왜 받으려고 했을까.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11월 14일 지시에서 ‘연구 목적’을 강조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시스템을 한 질씩, 상업적으로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연구의 목적으로 여러 개의 시스템을 한군데 모아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검토할 것”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경수 봉하사업본부장은 1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전자정부 사업은 노 전 대통령이 애착을 가졌던 참여정부의 성과”라고 강조한 바 있다. “자료는 참고만 하고 진흥원에 원본 그대로 돌려줬다”고도 했다.
하지만 보고서에는 ‘시스템 복사 가능성 검토’라는 참고 문건이 첨부돼 있다. 여기에는 전자정부시스템 복사본 구축 시 필요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구성은 물론이고 필요한 경비와 소요기간 등이 망라돼 있다. 청와대가 단순 ‘참고’를 넘어 복사본 구축을 실제 검토했다는 뜻이다.
물론 문건에는 ‘개인정보 보호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 시스템에서 사용할 데이터를 가상으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첨부돼 있다.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데이터를 제외한 시스템 자체만 복사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또 태스크포스(TF)는 보고서를 통해 “온나라, e-사람 등 3가지 시스템 복사본 제작에만도 14억 원가량이 필요하다”는 비용 문제를 제기했다. 법적인 부분과 비용 등을 고려할 때 노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가 이지원처럼 봉하마을에 전자정부시스템을 그대로 복사 및 구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노무현 청와대가 TF의 우려가 담긴 보고를 받은 이후에도 진흥원을 압박해 시스템 설계도 등 세부 자료를 통째로 받아간 데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된다. 개인적인 ‘애착’이나 ‘연구 목적’치고는 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새누리당 이진복 의원은 “외장하드에 담겨 청와대로 제출된 시스템 설계도 등도 국가기밀”이라며 “자료들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봉하마을에 지금도 보관돼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을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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