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어진 왕비’가 되라며 ‘인비(仁妃)’라는 고운 이름을 지어 주셨다. 온화한 미소를 지닌 손녀는 이제 한국 골프의 역사에 새로운 족적을 남겼다. 이름처럼 진정한 골프 여왕으로 불려도 될 것 같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올해의 선수’에 등극한 박인비(25·KB금융). 18일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1년 가까이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은 듯 가볍게만 들렸다. “진작 이런 순간이 왔어야 했는데…. 이번 주에 정말로 끝내고 싶었어요. 시간이 어찌나 더디게 가던지. 목표를 이뤄 날아갈 것만 같아요.” 이날 박인비는 멕시코 과달라하라CC(파72)에서 끝난 로레나 오초아 인비테이셔널에서 4위(최종 합계 11언더파 277타)에 오르며 올해의 선수 랭킹 1위를 확정지었다. 이 부문에서 박인비와 막판까지 치열한 경쟁을 펼친 수잔 페테르센(32·노르웨이)은 이번 대회를 공동 5위로 마쳐 박인비와의 포인트 격차가 39점으로 벌어졌다. 21일 개막하는 시즌 최종전 CME그룹 타이틀홀더스에서 페테르센이 우승하더라도 30점을 추가하는 데 그쳐 역전은 불가능하다.
올해의 선수상은 ‘세리 키즈’ 박인비의 우상이던 박세리(36)를 비롯해 한국 선수들이 밟아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고지였다. 최경주(43)가 아시아 선수 최고인 통산 8승을 거둔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도 물론 없었다. 박인비는 “정말 대단한 선배들이 많았는데 없었다는 게 이상했다. 당연히 누군가 있을 줄 알았다. 처음이라고 하니까 정말 하고 싶었다. 내가 자랑스럽다”고 감격스러워했다. 그는 또 “지난해 상금왕과 평균타수상을 차지했기에 올해는 올해의 선수에만 초점을 맞췄다. 후배들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고, 롤모델이 될 것 같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박인비가 새 이정표를 세운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올 시즌 상반기 정교한 아이언 샷과 컴퓨터 퍼트를 앞세워 메이저 대회 3연승을 포함해 6차례나 우승 트로피를 들 때만 해도 떼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즌 후반기 들어 그랜드슬램 달성에 대한 부담감과 컨디션 저하로 주춤거리는 사이 페테르센이 턱밑까지 추격했다. “롤러코스터 탄 것처럼 업다운이 심했어요. 쉽게 갈 수도 있었는데…. 힘들기는 했지만 가슴 졸이면서 느끼고 배운 것도 많아요. 그래도 이렇게 해냈으니 올해는 200% 만족이에요.” 싱거운 승부 대신 팬들을 흥미 있게 해준 거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인비는 “전 하나도 재미없었거든요”라며 웃었다.
묘하게도 마지막 날 박인비의 동반자는 페테르센이었다. ‘맞대결’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던 게 사실. “3라운드 끝나고 페테르센과 붙게 된 걸 알고는 운명이 아닌가 싶었죠. 페테르센이 요즘 워낙 핫(hot)해 압박감이 심할 것 같았죠. 어차피 다른 조에서 치더라도 리더보드를 통해 페테르센 성적을 의식해야 될 상황이니 차라리 옆에 있는 게 낫지 않겠냐고 편하게 생각했죠. 끝까지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경기를 마친 뒤 페테르센은 박인비의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해 주었다.
감격의 순간 박인비의 곁에는 늘 그렇듯 약혼자인 스윙 코치 남기협 씨(33)가 있었다. 4년 가까운 오랜 슬럼프 끝에 더이상 비참해지기 싫다며 골프를 그만둘 위기에 빠진 박인비를 구해낸 건 바로 사랑의 힘이었다. 박인비는 2006년 프로골퍼였던 남 씨를 처음 만나 연인으로 발전한 뒤 2011년 8월 약혼했다. 2년 넘게 늘 투어에 동행하는 남 씨는 내년 말 결혼하면 평생의 동반자가 될 소중한 사람. “오빠는 항상 자기 일처럼 내 일을 챙겨줘요. 흔들릴 때마다 잡아줬죠. 그런 존재가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오빠가 한식을 좋아하고 대회 기간이라 늘 호텔방에서 햇반하고 인스턴트 국으로 저녁을 때웠는데 오늘 밤은 오빠랑 어디라도 나가 축하 파티를 해야겠어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감에 젖어드는 박인비. 어느새 그의 시선은 내년을 향하고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너무 많은 대회에 나갔어요. 스케줄을 관리하는 일과 체력 안배가 중요해요. 시즌 내내 에너지 레벨을 100% 유지하고 싶어요. 커리어 그랜드슬램이 남았잖아요. 우승 못 해본 브리티시여자오픈이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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