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30대로 보이는 청년이 벤치에서 햇볕을 쬐고 있던 노인에게 다가가 몇 마디를 건네다 곧장 야단을 맞았다. 기분이 나쁠 법도 했지만 청년은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시 미소를 띠며 몇 발자국 떨어진 다른 노인에게 다가갔다. 방금 전 ‘사건’을 지켜봤던 노인은 더 크게 호통을 쳤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 없으니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8일 서울 종로구 종묘광장공원. 이곳은 서울노인복지센터와 값싼 이발소, 노인용품 상점 등이 밀집해 남성 노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하루에만 2000명 정도가 이곳을 방문해 해가 질 때까지 그들만의 여가를 즐긴다. 여가라고는 하지만 별것 없다. 볕이 잘 드는 공원의 벤치에서 장기와 바둑을 두거나 남들의 대국을 지켜보는 것, 그때그때 논란이 되는 이슈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벤치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다.
이곳에 올해 초부터 매주 금요일 공원을 찾는 이들에게 낯익은 광경이 펼쳐진다. 한낮의 태양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는 오후 2시 반. 공원의 가장 널찍한 공터에 10여 명의 젊은 남녀가 하나둘 모인다. 공원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젊은이들은 어느새 스피커를 설치한다. 이를 지켜보는 노인들의 표정에는 호기심과 짜증이 뒤섞이기 시작한다.
이런 눈길에 익숙한 듯 젊은이들은 망설임 없이 공터 주변의 노인들에게 다가간다. 젊은이들을 향한 반응은 두 가지다. 말없이 무시하거나, 호통을 치거나…. 긴 실랑이 끝에 결국 노인 몇 명이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젊은이들의 손에 이끌려 나온다. 어색한 기운이 닥치려는 순간. 스피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음악과 함께 흘러나왔다. “자, 어르신들 모두 저를 보고 따라 하세요.”
파란색 조끼를 입고 노인들을 공원 공터로 이끌어 낸 젊은이들은 연세대 스포츠레저학과 석·박사 과정의 대학원생들이다. 이들은 올해 3월부터 매주 금요일 이곳에 나와 1시간 동안 노인을 대상으로 한 체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노인체조 자원봉사’다. 이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한 연세대 스포츠레저학과 원영신 교수는 “가끔 공원에 갈 때마다 그곳에서 장기나 바둑을 두는 것 외에 별다른 활동 없이 시간만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노인들을 보고 안타까웠다.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여가 시간을 활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체조를 떠올렸다. 건강도 챙길 수 있고 어디서나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회학자 스탠리 파커가 정의한 노인 여가의 유형에 따르면 이곳 종묘광장공원을 찾는 노인들의 대부분은 ‘폐쇄형 여가활동’에 속한다. 몸이 불편해서, 또 늙음이 한탄스러워서 홀로 집안이나 공원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유형이다. 원 교수는 공원을 찾는 노인, 특히 남성 노인들의 여가 문화를 체조를 통해 바꾸고 싶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60대 이상 남성의 국민생활체육 참여율은 최하위권이다. 생활체육 미참여율은 60대 48.3%, 70대 56.3%로 선진국에 비해 아주 높은 편이다. 원 교수는 “노인들의 체력 측정 결과 어깨 관절 유연성과 평형성이 좋지 않았다. 고관절 위험성을 예방하기 위해 팔과 손목, 어깨를 운동할 수 있도록 체조 프로그램을 구성했다”고 말했다.
원 교수와 학생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쑥스럽고 귀찮다며 참여하길 꺼렸다. 시끄럽다며 훼방을 놓기도 하고 자원봉사자들을 공원 밖으로 내쫓으려 하는 노인도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춥건 덥건 매주 꾸준히 공원을 찾는 젊은이들을 보고 공원의 터줏대감들은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7월부터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연세대 스포츠레저학과 정경환 씨(32)는 “처음에는 종교 활동으로 오인하셨는지 다가갈 때부터 피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체조라는 말에 ‘남자가 무슨 체조냐’며 주먹을 휘두른 분도 있었다”고 말했다. 같은 과 김예리 씨(32·여)는 “참가를 권유하면 먼저 옆에 앉으라고 하면서 10분 이상 이야기를 건네는 어르신들이 많다. 혼자 있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그만큼 대화할 상대가 필요한 게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학생들이 앞에 선 채 음악에 맞춰 체조를 시작하자 미리 이끌려 나온 3명의 노인이 동작을 따라 했다. 간단해 보이는 움직임도 쉽게 따라 하지 못했다. 몇 번 정확하게 해 보려다 이내 포기하고 자신만의 동작을 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는 듯 체조 중간 중간 허리와 어깨를 연신 두드리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띄었다. 연세대 스포츠레저학과 이상희 강사(32·여)는 “매주 회의를 통해 어르신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동작을 연구한다. 어르신들은 조금만 지루하고 생각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바로 자리를 뜬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이 풀린 것일까. 제법 따라 하면서 미소를 짓는 노인들이 늘기 시작했다.
체조가 재미있어 보였는지 구경하던 노인들이 하나둘 합류했다. 어느새 20여 명이 체조를 따라 하고 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학생들의 동작을 곁눈질로 보며 체조를 따라 하던 김영만 씨(65)는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김 씨는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더니 힘들다. 눈으로 보기에는 쉬운 동작 같은데 마음처럼 잘 안 돼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중 동작을 곧잘 따라 하는 한 노인이 눈에 띄었다. 올해 75세인 임성기 씨는 평소에도 운동을 즐기며 건강을 관리해 왔다고 한다. 일을 마친 뒤 시청역에서 동대문의 집까지 걸어 다니다 금요일이면 공원을 찾아 체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임 씨는 건강한 몸 덕분에 고령에도 일을 하고 있다.
“내가 강남에서 빌딩 두 채를 관리하고 있어. 한 달에 150만 원 정도는 벌지. 애초 65세 이하 남성만 뽑는다는 빌딩관리인 구직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더니 나이를 묻곤 바로 거절하더라고. 억울한 마음에 광고를 낸 사장을 직접 찾아갔지. 사장이 날 보더니 건강한 것 같다며 당장 출근하라는 거야. 평소 운동을 많이 하니 이 나이에 일을 얻을 수 있었어.”
체조 프로그램이 끝나자 노인들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한 노인은 가방 안에서 귤 몇 개를 꺼내더니 학생들의 손에 쥐여준 뒤 발걸음을 옮겼다. 김예리 씨는 “자주 오는 분들은 먹을거리와 음료수 등을 싸 가지고 와서 주곤 하신다.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하시면서…”라고 말했다.
해가 지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있어야 한다. 이 프로그램에 세 번째 참가했다는 류성환 씨(81)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해가 지면 집에 간다. 집에 있으면 할 일이 없다. 아내는 이런저런 모임에 잘도 나갔다가 오는데 난 약속이 없다. 공원에 나온다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연배가 많고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위안을 얻는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9개월 동안 종묘광장공원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젊은 이방인들의 방문은 11월이 마지막이다. 본격적으로 추워지는 12월에는 공원을 찾는 노인들도 줄기 때문에 체조 프로그램을 중단한다. 그동안 보건복지부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진행됐던 종묘광장공원 체조 프로그램은 내년 3월에 다시 후원할 단체를 찾은 뒤 재개된다. 정경환 씨는 “이제 좀 어르신들이 반겨주시는 것 같은데 이별이라니 아쉽다. 추운 겨울에 어르신들이 이곳이 아닌 어디서 시간을 보낼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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