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진화론과 결별 에드워드 윌슨, 고갱의 그림 화두로 인류근원 추적
◇지구의 정복자/에드워드 윌슨 지음·이한음 옮김/416쪽·2만2000원/사이언스북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혹시 대중가요가 떠오르는가. 조용필의 ‘어제 오늘 그리고’를 떠올렸다면 요즘 세대는 아닐 터. 사실 이 철학적 질문은 프랑스 화가 폴 고갱(1848∼1903)이 그린 작품 제목이다. 타이티 섬을 배경으로 인간의 삶을 향해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걸작이다.
하버드대 석좌교수로 ‘통섭’ ‘개미’를 집필해 국내에서도 지지층이 상당한 세계적 생물학자인 저자가 고갱의 이 그림을 화두로 삼은 이유는 자명하다. 여든네 살의 노학자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구한 인간의 근원을 이제 결론짓고 싶어 한다. 인류는 어떻게 진화했고, 왜 이 땅을 지배하는 정복자가 되었는지를.
진화생물학에서 인간이 현 문명을 이룬 것은 정말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일이었다. 지구에는 인류 이전에 번성했다가 사라져 간 생물 종이 무수히 많았다. 호모사피엔스보다 앞선 여러 영장류도 상당 수준 진화했다가 마지막 계단을 딛고 올라서지 못했다. 이 지극히 낮은 확률 탓에 종교는 신이 인간을 선택했다는 논지를 펴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제로에 가까웠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최상위로 진화할 수 있었던 요인이 숨어 있다고 봤다. 예를 들어 훨씬 먼저 고도의 사회 조직을 이룬 개미나 벌들은 작은 덩치 탓에 불을 사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인간은 모든 정상적 구성원이 번식 능력을 지녔고, 이를 위해 경쟁하는 체제를 이뤘다. 경쟁은 다툼도 야기하지만, 연대와 동맹도 양산한다. 이는 절대적 위계질서와 혈연관계로 이뤄진 개미와 달리 유동적 구조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전략과 상황에 따라 속임수와 배신은 물론이고 호혜와 이타성도 끼어들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이쯤에서 저자는 인간의 본질을 다시금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흔히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로 대중에게 각인되어 온 유전자의 진화만으로는 인간의 번영은 불가능했다고 설파한다. 종족을 퍼뜨리려는 유전자의 개체적 본능과 사회공동체의 집단적 협력이 상생 작용을 일으킨 덕분에 인류는 여타 생물들을 제치고 왕좌에 오를 수 있었다.
‘지구의 정복자’는 엄청나게 논쟁적인 책이다. 그것도 핵폭탄 급이다. 동의하건 안 하건 누구나 이 정도 주장은 펼칠 수 있지 않나 싶겠지만, 그게 다름 아닌 에드워드 윌슨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랜 세월 유전자의 단일적 관점으로 진화를 설명하는 ‘혈연선택’의 주창자다. 1975년 ‘사회생물학’이란 책으로 진화생물학의 토대를 이뤄 낸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돌연 학계에서는 ‘집단선택’이라 부르는 유전자와 집단의 상호 영향을 강조하는 학설로 돌아선 것. 비유를 하자면 교황이나 추기경을 지낸 분이 여든 넘어 불교나 이슬람으로 개종하겠다고 선언한 충격과 진배없다.
그런데 그의 제자로 책을 감수한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에 따르면 저자의 전향(동료에겐 변절)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커밍아웃’이었던 모양이다. 1994년 ‘자연주의자’ 출간 때부터 윌슨 교수는 유전자의 혈연 선택에 불편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2005년 미국 텍사스에서 열린 학회에서 공개적으로 입장을 드러내더니, 급기야 2010년 ‘초협력자’를 쓴 마틴 노왁 하버드대 수학과 교수와 함께 네이처에 혈연선택을 공격하는 논문을 게재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표적 진화학자 156명이 반박 논문을 발표했고, 지난해 나온 ‘지구의 정복자’는 그 재반격을 총정리한 책이다.
솔직히 책의 주장이 썩 와 닿지는 않는다. 인용 사례들이 전작에서 익숙한 데다, ‘그게 아니니 이게 맞지 않나’라는 식의 몇몇 추론도 거슬린다. 이미 대세로 굳어져서가 아니라, 유전자 진화론의 견고한 논리를 깨뜨리는 결정적 근거도 약해 보인다.
그렇다고 윌슨 교수의 열정까지 폄훼할 수는 없다. 이미 일가를 이룬 대가가 업적과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열악한 이단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평생의 학문적 성과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결의는 경이로울 정도다.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현재 도달한 결과로만 승부하려는 학자적 자세도 존중해야 한다.
어쩌면 윌슨 교수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을 쓴 건 아닐까. 사실 진화론이 혈연선택으로 기울며 반대파, 특히 종교와는 만날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너 버렸다. 하지만 집단선택을 통해 진화가 유전자로만 결정된 게 아니라고 하면, 다시금 소통할 여지를 되살릴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아닐지…. 나이가 지긋해지면 옳은 게 항상 다 옳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처럼.
속내야 알 수 없으나 이제 고민은 그만의 몫이 아니다. 이미 밥상은 엎어졌다. 학자들은 한판 붙건, 다시 상을 차리건 또다시 치열한 시대를 맞았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자못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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