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ADIZ) 선포 이후 미중 갈등은 신흥 패권국과 기존 패권국 사이의 전형적인 패권 다툼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신흥국과 기존 패권국 사이의 마지막 갈등 단계인 군사적 충돌의 탐색전 성격을 띠고 있다. 이번 사건은 중국이 개혁·개방 35년간 축적해 온 경제력을 군사력에 투사해 좁게는 동아시아, 넓게는 글로벌 헤게모니를 놓고 미국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기 위한 전략적 승부수로 풀이된다.
○ ‘아시아의 병자’에서 ‘중화민족의 부흥’ 자신감
지난해 11월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18차 당대회)에서 당 총서기에 오른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취임 일성으로 ‘중화(中華)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약속했다. 이는 아편전쟁(1840∼1842년) 패배 이후 굴곡의 역사를 극복하고 과거의 지위와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중국은 1894년 청일전쟁 패배로 아시아에서의 패권도 일본에 내주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왕조시대를 청산하고 근대국가로 전환해 재기를 노렸다. 하지만 만주사변(1931년)과 국공내전(1927∼1949년)을 거쳐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했지만 문화혁명(1966∼1976년) 등이 이어지면서 질곡이 계속됐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 주도의 개혁·개방은 과거 성당(盛唐·당나라 융성기) 회복을 향한 재기의 동력을 끌어냈다. 개혁·개방으로 경제적 역량을 축적하던 중국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세계 강국으로 도약했다.
1990년 미국의 6.2%였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53% 수준으로 추격했다. 이르면 2020년 GDP 총액에서 미국을 앞지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중국이 경제에서 되찾은 자신감은 이제 군사와 외교로 확대되고 있다. ADIZ 갈등에서 중국이 보여 주는 모습을 보면 ‘앞으로 100년간 미국과 맞서지 말라’던 1980년대 덩샤오핑의 유훈은 잊은 지 오래다. 시 주석이 미국과의 갈등 없는 공존과 평화를 취지로 내세운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도 진정성을 의심받기 시작했다.
관영 환추(環球)시보는 29일 ‘미일은 중국이 일류 강국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사설에서 “대국 굴기(굴起·떨쳐 일어남)는 필연적으로 기존 국제 권력 구조와 충돌하며 이는 대외 충돌을 수반한다”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와 충돌하거나 충격파를 제어할 능력이 없다면 충돌 이후의 전략적 주도권을 상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해 거부감을 주는 ‘굴기’보다 ‘화평발전’이라는 말을 쓰던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미국, 중동에서 아시아로
아시아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키워 가는 중국에 대처해 미국은 2011년 11월 이후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정책을 펴 왔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 중동 지역에 집중하다 중국에 밀렸던 수세적인 상황을 재조정한다는 뜻에서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정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로 가속화된 미국의 경제력 쇠퇴를 중국 및 역내 국가들과의 활발한 경제 관계를 통해 만회하면서 동시에 중국의 팽창을 막기 위한 다목적 포석이다.
따라서 중국과 관련해 포용(engagement)과 봉쇄(containment)가 혼합되어 있다.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과의 경제 협력이라는 필요성과 전략적 패권 다툼에서 불가피한 대립적 요소가 줄타기를 하는 형국이다. 이번 중국의 일방적인 ADIZ 선포와 같은 군사적 도발은 중심추가 패권 다툼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도록 몰아가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재정난으로 연방정부 자동 재정 삭감(시퀘스터) 파동 속에서도 아시아 주둔 미군과 국방비를 감축하지 않은 것도 이번과 같은 사태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중국의 ADIZ 설정에 따른 긴장 고조는 미국으로선 골칫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아시아 지역 내에 군사적 개입의 명분을 제공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 아시아판 먼로 독트린 추구”
미중 양극 체제하에서 양국의 갈등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미국 내 현실주의 국제정치 학자들 사이에서는 중국의 이번 ADIZ 선포가 ‘중국판 먼로 독트린’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시카고대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중국이 강해질수록 아시아에서 미국을 몰아내려고 시도할 것”이라면서 미국이 먼로 독트린을 통해 미 대륙에서 유럽을 몰아낸 사례를 들었다.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1823년 유럽이 남북아메리카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한 먼로 독트린을 선포한 이후 유럽 제국과 미국 간에는 무력 분쟁이 한동안 계속됐다.
단기적으로는 최근 중국의 행태는 오바마 행정부의 ‘비(非)군사 외교 중시’ 정책에 큰 질문을 던졌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마빈 캘브 연구원은 “오바마 대통령은 시리아와 이란 문제 해결 과정에서 군사력에 의존하지 않고 외교에 집중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며 “그러나 중국은 이런 전략적 방침에 암운을 드리웠다”고 지적했다.
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는 “미중 대립이 격화되면 북핵 등 한반도 문제 해결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중국이 미국을 더 자극하면 대중 포위망 강화 등 부작용을 불러올 것을 알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수그러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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