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난 사람]청각장애인야구단 ‘대구호크아이’ 만든 박영진 단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7일 03시 00분


“꿈꿔왔던 직장 접었지만… 장애인 꿈 돕는 홈런 칩니다”

편집디자이너에서 야구단 단장으로 변신한 박영진 대구호크아이 농아인야구단장(위 사진). 박 단장이 선수들과 함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아래 왼쪽 사진). 청각장애인인 박 단장은 농아인들이 야구를 통해 즐거움과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2010년 4월 대구호크아이를 창단했다. 박 단장은 전공을 살려 농아인야구협회 홈페이지와 각종 팸플릿 및 현수막 등 야구 관련 디자인도 직접 맡고 있다. 박 단장이 디자인한 농아인 야구대회 팸플릿 표지. 대구=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편집디자이너에서 야구단 단장으로 변신한 박영진 대구호크아이 농아인야구단장(위 사진). 박 단장이 선수들과 함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아래 왼쪽 사진). 청각장애인인 박 단장은 농아인들이 야구를 통해 즐거움과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2010년 4월 대구호크아이를 창단했다. 박 단장은 전공을 살려 농아인야구협회 홈페이지와 각종 팸플릿 및 현수막 등 야구 관련 디자인도 직접 맡고 있다. 박 단장이 디자인한 농아인 야구대회 팸플릿 표지. 대구=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고민은 됐지만 결단을 내리는 데 거침은 없었다.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이번에도 남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것도 그동안 살면서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야구 때문에 인생에 큰 변화를 주는 결정이었다. 2010년 4월 대구호크아이 농아인야구단을 만든 박영진 단장(36). 시각 및 편집디자이너로 안정적인 삶을 살던 그는 올 4월엔 직장까지 그만뒀다. 이제 그에게 야구는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됐다.

박 단장은 2009년 대구대를 다니던 농아인 ‘아이’ 이진호 씨(26)를 만난 게 야구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됐다. 이 씨는 어릴 때부터 야구를 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 됐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가 비장애인들과 함께 야구를 시작했지만 역시 따라가질 못했다. 박 단장은 하고 싶은 야구를 못 해 고민하는 이 씨 같은 ‘아이들’을 위해 사회인팀을 만든 것이다. 장애인에게 따라다니는 수많은 ‘장애’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야구를 하는 그 자체로 즐거움과 희망을 찾는 선수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 팀 창단이었다.

창단 당시 선수들은 대부분 학생이었고 미취업자가 많아 예산이 부족했다. 그래서 영남대 야구팀에서 사용했던 중고 야구공과 배트 등을 얻어오는 등 야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자연스럽게 ‘단장’이란 직함이 주어졌다. 영화 ‘글러브’의 바탕이 된 충주성심학교 야구부를 졸업한 농아인 선수들이 사회에 진출하며 팀이 많이 생긴 것도 팀 창단을 도왔다. 2007년 대한농아인야구협회(www.kdeafbaseball.com·회장 박정석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장)가 만들어졌고 현재 14개 팀이 경기를 하고 있다.

“야구는 하고 싶은데 집안 형편과 미래 때문에 포기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죠. 농아인 사회인팀은 그런 ‘아이들’이 모인 곳입니다. 비장애인 선수들에 비해 실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열정만은 전혀 떨어지지 않아요. 농아인 선수들에게 야구는 삶의 활력소이자 희망입니다.”

‘아이들’에게 ‘왕누나’ ‘엄마’로까지 불리는 박 단장도 다섯 살 때 열병을 앓아 감각 신경성 난청으로 청각장애 2급 판정을 받은 농아인이다. 청각신경이 둔해져 서서히 귀가 나빠졌고 소리는 조금 들려도 알아듣질 못하더니 20대 중반에 아예 안 들리게 됐다.

박 단장은 청각은 잃었지만 부모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말하는 사람의 입술 움직임과 얼굴 표정을 읽는 구화법(口話法)을 배워 비장애인과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딸을 위해 24년간 복무하던 해군까지 그만뒀다. 복무지 때문에 집을 자주 비우는 아빠에게 ‘같이 살면 좋겠다’고 한 어린 딸의 한마디에 사직서를 냈다. 딸의 귀를 고쳐 주기 위해 대도시인 대구로 집도 옮겼다. 비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장애인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새 학기만 되면 선생님들을 찾아 “딸이 청각장애가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부탁하고 다녔다. 당시로선 ‘어떻게든 공동체에서 살아남고자 눈치를 봤던’ 기억이 떠오르지만 이런 부모님의 노력이 있었기에 박 단장은 더 열심히 살 수 있었다. 다른 농아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도 있게 됐다. 아버지는 들리진 않지만 말은 해야 한다며 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발음 교정을 해 주고 있다.

박 단장은 네 살 어린 남동생에게 늘 부끄럽지 않은 누나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부모님이 내게 더 많은 신경을 써 줘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좀 느꼈을 것 같다. 부모님은 똑같이 사랑해 주셨겠지만 항상 누나로서는 미안한 마음이 있다”는 그의 입에서는 동생 자랑이 술술 나왔다. “공부 잘했고 좋은 직장에 취직했고 결혼도 했고….” ‘난 단 한 번도 누나가 장애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동생의 말도 용기를 줬다. 주위에서 농아인이라는 측은한 시선을 많이 줬지만 오히려 더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사회생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경일여상 정보처리과와 계명문화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그는 한때 제빵사로 일하며 동생을 위해 빵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 누나 제빵사다”라며 자랑스러워하는 동생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제빵사는 박 단장이 사회에 나와 첫 번째 좌절을 겪으며 잠시 거쳤던 ‘임시직’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1998년 초. 여기저기 작품과 함께 이력서를 제출했고 입사시험에 합격도 했지만 청각장애라는 이유로 디자이너로 취업하진 못했다. 입사 합격을 통보하는 전화를 받는 어머니가 “우리 애가 잘 못 들어요”라고 하면 전화가 끊겼단다. 소통할 수 없다는 게 사회에서는 큰 ‘장애’를 가져다 줬다. 소통의 어려움으로 정보에서 소외되는 느낌도 줬다. 그래서 포기하고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워 제빵사로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 단장은 6년간 제빵사로 일하면서도 꿈을 버리지 않고 공부를 했다. 제빵회사는 전화 업무가 없어 근무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되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의 생활화, 최근 스마트폰의 등장 등 소통의 방법이 좋아지면서 다시 디자이너의 꿈에 도전하게 됐다. 농아인에게 스마트폰 시대는 ‘하늘이 준 선물’이다. 문자 및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없어졌다.

2004년 한양사이버대 디지털디자인학과에 편입했다. 제빵사 일을 계속하며 퇴근 후 매일 서점을 찾아 책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주말마다 서울로 올라가 각종 전시회를 보고 디자인 관련 특강도 들었다. 어릴 때부터 유일한 소통의 도구였던 책을 가까이한 게 큰 도움이 됐다. 듣고 싶은 강의가 많았는데 수화 통역이 지원되지 않아 수업의 20%만 이해했지만 책을 보며 이를 보완했다. 대학 때인 1997년 서울비주얼디자인 전국 공모전에서 특선상을 받았던 그의 실력은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2006년 제2회 수화 캐릭터 공모전에서 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각종 지방 장애인대회에서 입상했다. 2009년엔 전국장애인기능경기대회 전자출판 분야에서 금상을 받았고 2010년 국가대표로 선발돼 2011년 서울 제8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전자출판 분야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게 됐다. 2012년에는 행정안전부가 주는 동탑산업훈장도 받았다.

야구단 운영 등으로 시간에 쫓겨 회사를 그만뒀지만 박 단장의 시각디자이너 꿈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프리랜서 디자이너와 대구직업능력개발원 시각 및 편집디자인 강사로 일하며 석사과정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 더 많이 공부해 농아인과 농아인 야구를 사회에 더 알리는 게 목표다.

박 단장은 수화를 언어로 인정해 달라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2004년부터 대구농아청년회에 몸담은 뒤 2011년 한국농아청년회 부회장이 되면서 농아인들의 인권을 고민하고 있다. 농아인 인권에서 수화는 중요하다. 어릴 때 수화를 배우지 못하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수화를 언어로 인정해 자연스럽게 수화를 배우도록 하고 싶은 욕심이다. 수화가 언어가 되면 수화 통역사도 늘어나게 돼 농아인들이 사회에 더 잘 동화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야구단을 운영하면서는 다양한 그래픽으로 농아인들이 야구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찾고 있다.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몸동작이나 그래픽을 활용해야 하는데 아직 미미하다. 농아 선수들이 그래픽 하나만으로 야구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 계획이다. 농아인야구협회 홈페이지, 각종 팸플릿 및 현수막 등 야구 관련 디자인도 직접 하고 있다. 국제장애인올림픽, 국제농아인올림픽에 야구를 정식 종목으로 채택해 달라는 운동도 하고 있다.

박 단장의 야구 열정에 도움을 주는 분도 많다. 김상윤 수석코치(42)는 창단 경기 때 심판 자원봉사를 위해 왔다가 지도자가 없는 것을 보고 자원했다. 그는 대구농산물시장의 매천호크 사회인 야구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야구단 수화통역사 한준영 씨(27)는 2년 전 수화를 배우며 대구호크아이와 만나게 됐고 줄곧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경운대 아동사회복지학과를 나온 그는 박 단장을 도우며 수화를 익혔고 올 초 대구동구수화통역센터에 취직하게 됐다. CY야구아카데미 최철영 대표(36)는 내년부터 전담코치로 나선다. 프로야구 LG에 입단했다가 부상으로 일찍 선수생활을 마감한 최 대표는 고향 대구에서 유망주들을 키우고 있다. 대구호크아이의 첫 야구선수 출신 지도자다. 박 단장을 도와 주는 사람들은 “겉으론 우리가 도움을 주는 것 같지만 장애 속에서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더 힘을 받는다”고 입을 모은다.

박 단장의 열정에 이진호 씨는 지난해 서울농아인국제경기대회 때 시범종목이 된 한국야구대표팀의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지금은 직장생활로 야구에만 매진하기 힘들지만 주말마다 호크아이에 나와 훈련하고 있다. 박 단장은 “야구가 농아인들의 사회성을 키워 주고 서로 협동하는 법을 깨우치게 하는 등 장점이 많다. 특히 비장애인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적은데 야구 경기를 하면서 서로 친해지고, 자연스럽게 사회성도 익히고 있다”고 말했다.

2011년부터 농아인야구협회 홍보이사를 맡고 있는 박 단장은 올해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 입단 테스트에서 떨어진 양인하(18·충주성심학교) 소식을 최근 듣고 돕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야구를 계속하고 싶어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박 단장은 “농아인 프로 선수 1호가 탄생해 농아인 야구 선수들에게 희망을 주길 바랐는데…. 야구를 포기하고 돈을 벌 수 밖에 없는 인하가 너무 안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대구=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박영진#대구호크아이#청각장애인야구단#농아인 야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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