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네. 환해지니까 손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5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한복판에 자리 잡은 ‘청천시장’. 인구 5000명이 채 안 되는 두메산골에 반가운 도시 손님들이 찾았다. 한국전력 충북지역본부의 자원봉사자들이다.
한전 봉사단은 이날 시장 구석구석을 누비며 오래된 형광등을 발광다이오드(LED)등으로 교체하고 누전 위험이 있는 낡은 전선을 말끔히 정리했다. 불과 두어 시간 만에 어두침침하던 시장 골목이 대낮처럼 밝아지자 상점 주인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졌다.
○ 한전의 봉사활동, 시골 상인들의 마음을 녹이다
한전 본사와 14개 지역본부는 전국의 전통시장과 자매결연을 하고 노후 전기설비 교체 등 정기적인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는 한전 건물이 있는 시나 군 단위의 전통시장이 주요 사업 대상이었지만 조그만 시골 전통시장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메주를 만들다 한전 봉사단의 방문을 받은 음식점 ‘양반고을’의 신인순 씨(63)는 “큰 기업들이 이렇게 시골 시장에까지 관심을 가져주니 힘이 절로 난다”며 흡족해했다.
김용덕 한전 증평괴산지사장은 “외딴 지역의 시골 시장일수록 관리하기가 어려워 누전 등 안전사고 위험이 높다”며 “도심에서 시골로 봉사활동 범위를 넓혀 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전 직원들은 설비 교체 작업이 끝나자 점포마다 손난로를 건네며 절전 캠페인을 벌였다. 해마다 여름과 겨울이면 냉난방 전력수요가 급증하면서 전력 기근이 시작된다. 올해는 특히 강추위가 예상돼 한전도 절전 대책 마련에 비상이 걸렸다.
한전 충북지역본부의 이상기 차장은 “사용하지 않는 전자제품의 플러그만 빼도 10%의 전기 사용을 줄일 수 있다”며 “이 같은 대기전력만 차단해도 화력발전소 1기를 짓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전은 해마다 직원과 사측이 ‘사랑 펀드’라는 봉사활동 자금을 모은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내면 사측이 모인 돈의 2배를 추가해 봉사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한다. 한전 산하 본부 가운데 충북지역본부는 봉사활동에 가장 적극적이다. 올 한 해에만 2억4000만 원의 펀드를 만들어 전통시장에서 사내 식당용 음식재료 구매, 불우이웃을 위한 물품 구입 등에 쓰고 있다.
한전 충북지역본부는 이날도 청천시장에서 쌀 300kg과 현미, 콩 등 100만 원어치를 구입해 장애인시설과 노인복지시설에 전달했다.
한전 충북지역본부 경영지원팀의 연대홍 차장은 “청천시장은 상인들의 자립 의지가 높은 데다 최근 외부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시장”이라며 “앞으로 이 시장에서 물품 구매를 점차 늘려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 ‘자연’을 닮은 시장, 자연을 판다
청천시장은 국내 1500여 전통시장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부활한 시장이다. 충북에서도 오지인 데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생존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상인회를 중심으로 점포 주인들이 합심해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우리처럼 작은 시골 시장이 주민들만 상대하면 무슨 돈이 되겠어요? 살아남으려면 우리끼리 똘똘 뭉쳐 외지 손님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지요.”(청천잡곡상회 정지언 사장)
청천시장의 성공 비결은 “깨끗하고 좋은 먹거리를 저렴하고 친절하게 파는 서비스 정신”이었다는 게 상인들의 이구동성이다.
실제로 청천시장 상인회는 외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산나물축제, 캠핑축제, 버섯축제 등 철마다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이를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모바일 앱’ 제작과 파워블로거를 활용한 ‘시민 홍보단’도 운영했다. 덕분에 9월에 열리는 ‘버섯축제’는 30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청천시장의 대표 브랜드가 됐다.
정부 추진 사업을 의욕적으로 따낸 것도 도움이 됐다. 청천시장은 2009년 ‘거점면 소재지 개발사업’ 시범지역으로 선정돼 전국 최우수평가를 받았다. 서해구 청천시장 상인회장은 “최근 2, 3년간 청천시장의 점포당 매출은 평균 50% 이상 늘었다”며 “이제는 해마다 30∼40개의 지자체와 전통시장이 청천시장을 견학 올 정도”라고 자랑했다.
청천시장의 잇따른 작은 성공 경험은 상인들의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해마다 손님이 늘고 벌이가 나아지자 상인회 행사에 마지못해 참여하던 상인들이 바뀌기 시작한 것. 상인들끼리 뭔가 해보자는 에너지는 다양한 동아리 활동으로도 이어졌다. 청천시장에는 현재 댄스스포츠 밴드 배드민턴 민요 등 6개의 동아리가 활동하고 있다.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상신철물종합건재 이지영 씨(40)는 “예전 같으면 겨울에 고스톱이나 치면서 허송세월했지만 이제는 눈에 띄게 건전해졌다”며 “서로 어울리면서 장사에 도움 되는 이야기를 나누고 스스로 시장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놓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괴산=김창원 기자 changkim@donga.com
▼ 장류 담근 장독 수백개 개인에 분양… 마니아층 인기 ▼ 우리시장 스타/ 도해죽염 주경섭 대표
“음식은 정성이 중요해요. 음식을 대충 만들면 잠시 고객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소비자 입맛까지 속일 수는 없어요.”
도해죽염 주경섭 대표(46·사진)는 상인이라기보다 장인이다. 그는 천일염을 대나무 통에 넣고 800도가 넘는 고온에서 9번이나 구워내는 복잡한 생산 과정을 고수하는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정통파 죽염 장인이다. “천일염 10t을 구우면 건질 수 있는 죽염이 겨우 1t이지만 일반 소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천연조미료가 된다”는 게 주 대표의 설명. 국내에 300곳이 넘는 죽염 생산업체 가운데 10년 넘게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다.
주 대표는 죽염과 함께 고추장 간장 등 각종 장류도 직접 담근다. 고객 입맛에 맞춰 주문생산을 받아 각자 지정된 개별 장독에 저장해 주기도 한다. 정통 방식을 고집하는 만큼 가격은 다소 비싼 편이지만 일부 마니아층에서는 입소문이 대단하다. 실제로 뒷마당에 널려 있는 수백 개의 장독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연예인과 기업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장독들을 구경하는 재미 덕분에 도해죽염은 청천시장을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 코스가 됐다.
청천시장 상인들과 농민들은 주 대표를 청천시장의 대표 스타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도해죽염의 각종 장류의 원료인 콩 고추 올갱이 등을 이 지역 상인과 농가로부터 직접 조달하기 때문. 청천시장 서해구 상인회장은 “해마다 사들이는 콩만 해도 1t이 넘는다”며 “도해죽염이 유명해질수록 지역민의 주머니도 넉넉해진다”고 말했다.
▼ 청천시장 친환경 상설시장 속 5일장-토요장터 눈길 ▼
청천시장은 해발 250m의 청정 지역에서 맑은 물과 깨끗한 땅이 키워낸 친환경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봄에는 올갱이와 산나물, 여름에는 대학찰옥수수, 가을에는 각종 야생버섯, 겨울에는 절인 배추 등 사시사철 각종 특산물이 넘쳐난다. 덕분에 전국 1500여 개 전통시장 가운데 가장 ‘자연을 닮은 시장’으로 꼽힌다.
100여 개 점포가 1년 365일 문을 여는 상설시장이지만 매달 6차례(5, 10, 15, 20, 25, 30일) 5일장이 선다. 매주 토요일에는 주말 나들이 고객을 위해 ‘토요장터’(3∼11월)가 열려 각종 농산물과 특산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청천시장 상인회는 토요장터를 운영해 번 돈의 일부를 괴산군 장학회에 기부하고 있다.
청천시장은 최근 인구가 급격히 줄면서 생존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2009년 지역개발사업(거점면 소재지 개발사업) 평가에서 1위에 올랐고 올해는 ‘문화관광형 시장’에 선정돼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특히 9월에 열리는 버섯축제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수천 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덕분에 전국 전통시장 가운데 가장 성공한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꼽혀 전국 전통시장 상인들이 배우러 오는 시장이 됐다. 시장 관련 상담 및 문의 △ 동아일보 기획특집팀 02-2020-0636 changkim@donga.com
△ 시장경영진흥원 02-2174-4412 jammuk@sijang.or.kr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