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지린내 나는 오줌을 찍어 맛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농사꾼들 소매를 붙들고 서서 모내기는 언제 하는 게 좋은지, 한 뿌리에 고추 열매는 몇 개나 달리는지 캐물었다. 동네사람들은 아버지를 보고 수군댔다. “저 양반이 선비야, 농사꾼이야?” “벼슬살이하다 쫓겨났으니 제 정신이 아닌 게지.”
서유구(1764∼1845)는 조선의 브리태니커라 불리는 ‘임원경제지’를 편찬한 조선 후기의 학자다. 서유구가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의 아들 우보의 시각을 통해 동화로 풀어냈다. 실제로 아들은 ‘임원경제지’ 전체를 교정하는 고된 작업을 맡았다.
정약용(1762∼1836)과 동시대 인물인 서유구는 18년 동안 서민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기록하며 연구했다. 농업, 의학, 생물학, 예술, 천문, 식품 등 16가지 분야에서 조선시대의 다양한 지식을 집대성한 ‘임원경제지’는 총 113권에 달한다.
서유구 부자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저자는 ‘임원경제지’에 담긴 내용을 토대로 풀어가면서, 농사꾼이 돼버린 양반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마음을 상상의 실로 삼아 이야기를 직조했다. 아들은 한때 종3품 벼슬에까지 올랐던 아버지가 초라한 행색으로 농사일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밭에 거름 주는 일까지 학문이라고 말씀하시려는 것이냐”는 아들의 반발에 아버지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추구하는 학문이 바로 우리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그런 학문이란다. 학문적 성과가 쌓이면 백성을 풍요롭게 할 것이니라. 또한 그리 해야만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을 수 있느니라.”
서유구는 청나라에서 가져온 북감저(감자)를 심고, 18세기 일본의 백과사전 ‘왜한삼재도회’에 소개된 가수저라(카스텔라)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당대 가정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한 ‘규합총서’를 쓴 서유구의 형수 빙허각 이씨도 등장한다.
이야기는 홍수를 겪으며 몸이 상한 우보가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몸을 추스르는 장면으로 끝난다. 현실에서 우보는 건강 악화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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