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젤라토 전문점 ‘에쎄레’ 매장을 찾은 한 여성이 딸기 맛 젤라토를 찾자 점원이 고개를 저었다. 딸기 바닐라 초코는 아이스크림 맛의 기본 3요소 아니던가. 그 손님은 결국 딸기와 맛이 비슷한 라즈베리 젤라토를 사갔다. 제철 과일이 아니면 재료로 쓰지 않는 고집 센 가게 주인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채널A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에서 착한식당으로 선정된 에쎄레의 정철호 대표(34)가 마침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8월 방송이 나갈 당시엔 경남 창원시에서 영업했던 에쎄레는 9월 초 이곳으로 이사했다. 이탈리아에서 젤라토 만드는 법을 공부한 정 대표는 2년 전 국내 처음으로 100% 천연 재료로 만드는 젤라토 가게를 열었다. 젤라토와 사랑에 빠진 내성적인 청년
정 대표는 매장에 들어오자마자 주방으로 들어가 한참 동안 재료 점검을 마친 뒤에야 기자에게 다가와 명함을 건넸다. 평소에도 가게 아르바이트생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성격이란다. 말 없던 그가 젤라토 이야기를 꺼내자 태도가 돌변했다. 아이스크림과 젤라토는 비슷한 게 아니냐고 묻자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저희 가게에서 파는 건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젤라토예요. 소프트 아이스크림, 일반 아이스크림, 젤라토 이렇게 세 개는 엄연히 다르거든요.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시중에 나오는 혼합액을 얼려서 기계로 짜 내면 끝이에요. 일반 아이스크림은 아시다시피 탈지분유와 식용유 등이 들어가서 영양성분이 거의 없어요. 젤라토는 우유나 과일을 주재료로 써서 5대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죠. 지방이 적고 공기 함량이 낮아서 쫀쫀하게 느껴져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그가 어떻게 젤라토에 빠져든 걸까. 정 대표는 수줍은 표정으로 “그냥 어릴 때부터 아이스크림이 좋았다”고 했다. 특히 ‘쭈쭈바’와 ‘캔디바’ 같은 빙과류를 좋아했단다. “지금도 만들면서 많이 먹어요. 만들자마자 먹고, 몇 시간 지난 후에 먹고, 만든 지 만 하루가 지나면 그것도 먹어 보고. 시간대별로 맛이 다 다르거든요.”
하지만 젤라토 때문에 조리학과를 택한 건 아니다. 정 대표는 대구의 한 전문대 호텔조리학과에서 이탈리아 요리를 전공했다. 그중에서도 화덕에 구운 나폴리 피자가 주 종목이다. 그는 “피자를 공부한 덕분에 젤라토 토핑으로 들어가는 모차렐라 니코타 치즈는 매장에서 직접 만들어서 쓴다”고 했다.
졸업 후 줄곧 요리에만 전념한 것도 아니다. 사진작가, 의상 디자이너, 클럽 DJ로 잠시 ‘외도’를 했다. 하고 싶은 일은 못 참는 성미라 과감하게 직업을 바꿨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참기 힘들었다. 정 대표는 “대학 졸업 후 의상 디자인 일을 할 땐 진짜 돈이 없었다. 장롱에 걸어 둔 옷 주머니를 뒤져 100원짜리를 찾아 라면을 사먹은 적도 있다”고 했다.
여러 직업 사이에서 방황하던 끝에 그는 2009년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다. 진로를 두고 갈팡질팡하던 끝에 내린 답은 결국 요리였다. 피자 요리법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찾은 나폴리에서 그는 1년간 피자는 물론 빵 젤라토 커피 그레페 초콜릿 만드는 법을 마스터했다. “여러 가지를 배우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뭘까?’ 그때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던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른 거죠. 초심으로 돌아가자!” 국내 1호 100% 천연 젤라토 ‘젤라티에레’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정 대표는 2011년 3월 고향인 창원에서 100% 천연 재료로 젤라토를 만드는 에쎄레를 열었다. 커피 만드는 이를 바리스타라고 부르듯 젤라토를 만드는 사람을 이탈리아어로 ‘젤라티에레’라고 한다. 국내 1호 천연 젤라토 젤라티에레가 된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유명한 토산물을 공수해 메뉴를 개발했다. 창원 에쎄레는 판매가 목적이 아니라 레시피를 연구하기 위한 일종의 실험실과 같은 곳이었다.
3년 가까운 연구 끝에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이한 젤라토 종류가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생강과 맥주를 넣은 ‘스위트 진저 비어’, 강원 철원군 오대쌀로 만든 ‘여왕의 쌀’, 제주에서 난 모싯잎으로 만든 ‘에쎄레 모시’, 창원시 북면의 단감으로 만든 ‘로또촉’ 등이다. 계절과 상관없는 초코 바닐라 같은 메뉴를 제외하고는 매일 들어오는 재료 상태에 따라 30여 가지의 메뉴를 수시로 바꿔 낸다.
“쌀 젤라토를 만들려고 전국 각지의 좋다는 쌀은 거의 다 사 봤어요. 다른 지역의 쌀은 두 번 삶으면 으스러져서 형태가 사라졌는데, 철원 오대쌀은 끝까지 모양이 유지되더라고요. 지금 쓰는 재료로 결정한 뒤 안정적으로 공수받기까지 3년 가까이 걸린 것 같아요. 사과 젤라토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경북 사과가 좋다고 하면 그 지역 농장 사과를 다 사들여서 실험해 보는 식이죠.”
요즘 정 대표가 꽂힌 천연 재료는 다래다. 전남 보성에서 유기농으로 다래를 키우는 농장을 수소문해 젤라토를 만드는 1차 실험을 마쳤다. 또 다른 후보 농장의 다래는 출하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제철 과일은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게 힘들어요. 하우스 과일을 쓸 수도 있겠지만, 제철이 아니면 과일 향이 진하지 않아서 맛이 없어요.”
레몬이나 오렌지 같은 수입 과일을 제외한 모든 재료는 국내 원산지에서 직접 구한다. 2차 가공된 ‘죽은 재료’는 절대 쓰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경영 철학이다. 제주 농부가 재배해 볕에 말린 모싯잎을 산지 직송으로 받고, 창원에서 친지가 농사지은 참깨 무화과 등을 받아서 쓴다. 충남 공주의 정안 햇밤, 제주 무착색 귤도 현지 농장과 직거래한다. 질 좋은 재료만 고집하다 보니 한 컵에 3800원을 받고 팔면 이 중 60% 정도가 재료비로 나간다.
결벽증에 가까운 천연 재료 사랑 때문에 에쎄레에서는 토핑과 아이스크림콘까지 직접 만들어 쓴다. 토핑으로 들어가는 오렌지 껍질 절임은 시중에 통조림 제품으로 나와 있지만 매장에서 오렌지 껍질을 살균해 설탕과 함께 수차례 끓여서 만든다. 일반 공장에서 찍어 낸 아이스크림콘에는 색소가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매장에서 직접 만들어서 사용하다가 최근에는 손님이 늘면서 전문 업체에 제작을 맡겼다. 아이스크림에 많이 들어가는 유화제 안정제 같은 첨가물은 전혀 쓰지 않는다.
100% 천연 재료를 쓰기 때문에 겪는 고충도 있다. 인공 색소와 향료에 익숙해진 손님들이 “맛이 이상하다”며 항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시중에서 파는 피스타치오 맛 아이스크림은 초록색인데, 저희 집은 색소를 안 쓰기 때문에 흰색에 가깝거든요. 또 아몬드나 땅콩 같은 저렴한 견과류를 섞지 않고 피스타치오만 볶아서 쓰다 보니 손님들이 처음엔 맛이 이상하다고 해요. 기존에 먹었던 인공 색소와 향료가 범벅된 잘못된 아이스크림을 진짜라고 생각하는 거죠.”
하루에 3시간만 자며 메뉴 개발에 몰두한다는 정 대표는 내년에 젤라토 스쿨을 열 계획이다. “우리나라는 젤라토 불모지예요. 본고장인 이탈리아에 가야만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국내에서 젤라토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천연 재료로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작은 공방처럼 운영할 계획입니다. 무조건 이탈리아식을 따라하는 것도 싫어요. ‘에쎄레 스타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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