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여파로 한일 관계는 어느 때보다 악화됐다. 새해 한일 관계는 어디에서 개선의 실마리를 찾을지가 과제다.
지난해 12월 25일 일본 도쿄(東京) 이와나미서점(출판사) 회의실에서 양국의 대표적 지식인 4명이 모여 한일 관계 현안에 대해 깊이 있는 의견을 교환했다. 이들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던 2010년 “한일 강제병합은 원천무효”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던 한일지식인회의 공동대표인 김영호 미국 하버드대 초빙교수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 당시 성명에 서명했던 일본의 대표적 진보잡지 ‘세카이(世界)’의 전 편집장 오카모토 아쓰시(岡本厚) 이와나미서점 사장,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 대표인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 오사카경제법과대 교수 등이다.
이들은 공동성명 발표 배경과 관련 논문을 담은 책 ‘한일 역사문제의 핵심을 어떻게 풀 것인가’를 지난해 12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출간한 것을 계기로 만나 꽉 막힌 한일 관계의 해법을 논의했다. 좌담회 이튿날 아베 총리가 신사 참배를 강행하자 참석자들은 추가로 견해를 보내왔다.
미국 내 아시아 정책 전문가들과 자주 만나고 있는 김 초빙교수는 특히 “한국 정부가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비판하는 데 머물지 않고 새로운 아시아에 대한 ‘그림’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한국이 ‘고루한 반일(反日)’에 머무르고 있다는 시각이 크다”며 “한국이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중국 견제라는 현실적 필요성 때문에 앞으로도 미국에서 일본의 주장이 먹혀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파장이 커지고 있다.
▽김영호=미국이나 한국이 쓸데없는 기대를 하지 않고 아베 총리의 본색에 맞는 정책을 수립할 수 있게 됐다. 아베 총리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면 집단적 자위권 등의 추진력이 약화될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위안부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역전의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한일 정상회담은 당분간 말도 안 꺼내는 게 좋겠다. 그렇다고 실무 접촉을 피할 필요는 없다.
▽오카모토=중국 한국과의 관계가 적어도 1년은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도 ‘실망’이라고 표현했다. 이건 명백한 아베 정권의 외교정책 실패다. 일본 국민 사이에서는 아베 정권의 폭주가 시작됐다는 우려가 강해지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헌법이 정한 정교분리 원칙에도 위배된다. 행동으로 헌법을 바꿔버린 셈이다. 이런 식이라면 (일본의 군대 보유와 전쟁을 금지한) 헌법 9조도 위협받게 된다.
▽와다=주일미군 오키나와(沖繩) 현 후텐마(普天間) 비행장 이전이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국에 주면 신사 참배는 눈감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오산이었다.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 해결 방안은….
▽오카모토=‘해결’이라는 용어를 쓰는 게 과연 맞는지 의문이다. 일본은 간단히 ‘해결’이니, ‘사죄’니 얘기하지만 피해자들은 아직까지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그걸 가해자는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바다 건너에서 당시 병사들이 한 짓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해결이 어렵다는 전제로 사죄하고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마음을 전하는 게 중요하다.
▽우쓰미=1990년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강제 수용했던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1인당 2만 달러(약 2100만 원)의 배상금과 함께 ‘사죄의 편지’를 써서 전달했다. 편지에서 그는 해결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잘못된 과거를 다시 되돌릴 수 없지만 우리는 여러분에게 저지른 잘못을 인정해 정의를 바로 세우려 한다”고 적었다.
화해는 사죄의 마음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누가 사죄하면 옆에서 누군가 이상한 말(망언)을 되풀이해 왔다.
▽와다=강제 징용자 문제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게 끝났다고 하면 한일 간에 ‘심리적 화해’는 불가능하다. 다만 위안부 문제에서 보듯 국가가 국민을 대표해 사죄하는 행동을 피해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해자가 피해자를 비판하는 감정적 대립이 발생한다. 지금 일본 내 반한 움직임은 그런 감정을 이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해 국민과 피해 국민이 협력해 진정한 ‘사죄’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참석자들은 언론이 내셔널리즘을 선동하고 있다고도 우려했다. 반한 기사를 쏟아내는 일본의 주간지는 물론이고 주요 언론도 자국에 유리한 사실만 보도하면서 자국 비판에는 약하다는 지적이었다.
2010년 공동성명 발표는 5월에 200명, 7월에 1000명의 양국 지식인이 서명할 정도로 높은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성명 이후 한일 관계가 더욱 악화된 데 대해 참석자들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오카모토=오랜 기간 교류하면서 문물을 전파해 준 이웃 나라를 침략해 식민지화한 나라는 역사적으로 별로 없다. 한국의 한이 깊을 수밖에 없다. 중국도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했다. 이게 문제의 원점이다. 일본인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와다=아베 총리라 할지라도 과거사를 전면 부정하면서 자리를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위안부는 필요했다”고 발언한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이 일본 안에서 전면적인 비판을 받으며 지지율이 추락한 것은 아베 총리에게 충격이었다.
▽우쓰미=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아프리카 식민지 정책과 학살에 대해 다시 보기 운동이 진행돼 왔다. 재판에서 피해자 보상을 명령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간에도 이런 인식을 나타내는 담화와 성명이 나와 있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구체화하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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