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봄, 강원 삼척군 북평읍(현 동해시) 북평고교를 갓 졸업한 김진선은 서울에 가서 뭐 좀 해볼까 하고 고향집을 나섰다. 대학은 가정형편상 어림도 없었다. 마침 마을교회 권사님의 소개로 서울 약수동 로터리의 한 약국에 가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공부도 해볼 기회가 생겼다. 약봉지를 접거나 손님맞이, 청소, 심부름 정도를 하면 된다고 했다. 잘하면 어디 신학대나 야간대학이라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 병마에 자리보전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마을 어귀에 쭈그리고 앉아 아들을 배웅했다.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동구 밖 모퉁이를 돌 때까지 하염없이 뒷모습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김진선도 그걸 알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도 눈물이 흐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가 태어나 자랐던 삼척군 북평읍 용정마을 ‘100호 사택’(현재 동해시 용정동 동부메탈 사택)과도 이별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병을 앓았다. 일종의 해소병(기관지 천식)이었는데 산후조리를 잘못한 탓이라고 했다. 평생 그렇게 사시다가 1967년 쉰둘에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형과 나 그리고 남동생은 밥, 반찬과 빨래도 하고, 급할 땐 어머니 주사도 놓아드렸다. 막내 여동생은 그러기엔 너무 어렸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저 눈물이 난다. 난 딱 두 번 어머니 등에 업힌 기억이 있는데, 한번은 1951년 1·4후퇴 때 피란 나갔다가 큰댁이 있는 삼척군 근덕면 맹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어머니 등에서 포대기를 들춰 밖을 보니 목화솜 같은 눈이 펑펑 흩날리고 있었다. 또 한번은 초등학교 시절 하굣길에 진눈깨비가 엄청 쏟아졌는데, 누가 앞쪽에서 ‘진선아!’ 하고 불렀다. 마중 나온 엄마였다. 엄마는 ‘업혀라!’며 나를 포대기로 감쌌다. 아, 그 따뜻했던 엄마의 체온, 내 평생 그렇게 행복했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임종 때도 ‘진선아, 진선아!’ 자꾸 내 이름만 불렀다.”
‘100호 사택’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지어진 공장사택 100가구를 일컫는 말이다. 언뜻 보면 군대 막사와 비슷하다. 아버지가 광복 후 카바이드(CaC₂·탄소화합물)공장으로 바뀐 그곳 노동자였기 때문에 그 사택에서 살았던 것이다. 100호 사택마을은 대지가 무려 3만 평에 가까웠다. 마을 앞마당은 웬만한 학교 운동장보다 넓었다. 어린 김진선은 그곳에서 돼지오줌통으로 축구도 하고 딱지치기, 구슬치기, 연날리기, 제기차기를 하며 천방지축 뛰어놀았다. 사택 주위에 평행봉이나 샌드백을 만들어 놓고 근육을 키우기도 했다. 명절엔 집집마다 돌며 세배하기에도 바빴다. 모두 공장노동자들이라 그만큼 외지인이 많았고 계층도 다양했다. 한편으로는 응집력이 강했고,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2km 떨어진 송정리에 2만여 명 살았지만, 사택아이들은 그곳 아이들에게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렇게 김진선은 가난했지만 구김살 없이 씩씩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게 없었다. 반에서 1, 2등을 다투었고 글짓기나 웅변에도 능해 어린이회장까지 맡았다. 그뿐인가. 축구, 배구선수에 기계체조, 태권도 발차기(까대기)에도 능한 팔방미인이었다. 훗날 테니스나 스케이트, 윈드서핑, 암벽타기 등 운동에 만능이 된 것도 다 그 덕분이었다. “사람을 키우는 건 산천이 절반이라는 데 난 그런 면에서 엄청난 행운아였다. 우리 동네 뒷자락엔 두타산(1352.7m)과 청옥산(1403.7m)이 병풍처럼 우뚝 서있고, 앞섶엔 푸른 동해바다가 은물결 금물결로 넘실거렸다. 난 두타산 무릉계곡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리고, 북평 앞바다 명사십리해변에서 미역을 감으며 자랐다. 우리 동네에서 명사십리까지는 1km 남짓이나 될까. 야산의 골진 밭둑을 따라 내려가다가 동해북부선 철길을 넘으면 바로 눈부시게 하얀 모래밭이 아스라이 펼쳐졌다. 난 친구들과 목만 내놓고 개구리헤엄을 치다가 지치면 갯바위에 앉아 갈매기를 벗 삼아 쉬곤 했다. 북평고 3학년 때 ‘한일회담 반대 데모 주동자’로 무기정학을 받았을 땐, 그 갯바위에서 그때까지 썼던 일기장을 모두 불태워버리기도 했었다. 그 이후 이번에 처음 가보니 그 갯바위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대신 해군체력단련장(골프장)과 휴양소가 들어섰다. 물론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정작 내 눈으로 보니 참혹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 꿈이 영글었던 명사십리해변과 늘 푸른 솔밭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다니….”
북평중을 졸업한 김진선은 당시 지방명문이었던 강릉상고 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다닐 수가 없었다. 3등 안에 들었어야 장학금을 받았을 텐데 그게 물거품이 된 것이다. 어쩌면 당시 이정순 영어선생님이 없었다면 영영 학업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이 선생님은 “학업은 결코 중단하면 안 된다”며 한 달 치 봉급을 기꺼이 털어 그를 북평고에 다니도록 해주었다. 2851원! 바로 그가 평생 억만금보다 귀하게 여기는 ‘소중한 돈 액수’이다.
김진선은 고2 때부터 느슨해졌다. 서클에 가입하고 여학생과 미팅도 하고, 당시 인기잡지 사상계에 빠지는 등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괴짜 짓도 많이 했다. 덕지덕지 기운 교복을 입고 다니는가 하면(별명 ‘백결선생’), 짚신도 신고 다니고, 북평 큰길에 오줌도 깔기고, 시험 치를 때 ‘백지동맹’으로 선생님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그러다가 학생회장에 출마해 무려 302표 차로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비뚤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타고난 절제력 덕분이었다. 두타산에서의 ‘정신수련’이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됐다. 그는 고교시절 해마다 한 번씩 두타산 무릉계곡 토굴에서 사흘 동안 심신수련을 했다. 친구들과 같이 야영을 하기도 하고, 혼자서 용추폭포나 문간재 아래에서 72시간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단식을 하기도 했다. 이름 모를 묘지 옆에 혼자 텐트를 쳐놓고 며칠 밤낮을 견딘 적도 있다. 언젠간 한겨울 무릉계곡 바위굴에서 침낭 하나로 버티며 밤새 물소리를 들으며 명상을 하는데,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카빈총을 겨누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왠지 그렇게 나 자신을 추슬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도를 닦았다고나 할까. 자신을 단련해 보려는 의지에서랄까. 어쨌든 성취감 같은 것을 적잖이 느꼈다. 밤새 계곡물소리를 한번 들어보라. 그 소리는 별별 이상야릇하고, 신비하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졸졸∼ 찔찔∼ 동동∼ 구룩꾸룩∼ 쭉쭉∼ 또또록…. 그런 경험을 한 번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웬만한 일엔 쉽게 호들갑 떨지 않는다. 엄청난 충격과 쇼크도 느릿느릿 곰삭아서 다가온다. 나의 강한 집중력과 목표 지향적인 성격이 그때 길러진 것이 아닌가 한다. 재수생활과 군대를 마친 후 대학에 들어가 4학년(1974년) 때 행정고시에 합격한 것도 그 덕분이다.”
그렇다. 김진선은 소처럼 우직하다. ‘원칙과 정직’이라는 화두를 잡고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스타일이다. 누가 뭐래든 혼자서 묵묵히 ‘바늘로 우물을 팔 뿐’이다. 3수 끝에 겨울올림픽 유치를 한 것도 다 그런 힘이 밑바탕이 됐다. 그는 미신이 아니라 ‘사람의 정성’을 믿는다. 절박함과 간절함이 하늘을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1998년 강원지사 선거에 나설 때 태백산 천제단에 가서 기도한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그는 그 이후에도 매년 정초에 ‘국태민안 도태민안’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1998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15년 동안 종교와 종파를 넘나들며 절실히 겨울올림픽 유치기도를 드렸다. 우리나라 불교의 5대 적멸보궁(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 영월 법흥사, 정선 정암사)과 개신교, 천주교 성지 등은 물론이고 해외에 나가면 그 도시의 대표적 종교시설(성당, 불교 사원, 교회, 이슬람 사원, 러시아정교회 사원)에 가서 절실하게 기도했다. 가톨릭 세계 3대 성모발현 성지(포르투갈 파티마성당, 프랑스 루르드성당, 멕시코 과달루페성당)도 빼놓지 않았다. 두 번이나 올림픽 유치에 실패했을 땐 스스로 ‘내 정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그 바쁜 와중에 무박 당일치기로 기독교 예루살렘성지를 다녀오기도 했다.
“1980년 첫아들(1남 2녀)을 얻었는데 정신지체장애아였다. 하늘이 무너지고 앞이 깜깜했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고 극복하고 초월하는 데 15년 넘게 걸렸다. 그런 과정에서 종교도 기독교에서 불교로 바뀌게 되었다. 이젠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결코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집착을 끊고 편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난 40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내가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 억지로 참았다. 고교 졸업 후 서울 광화문 국제극장에서 소년가장 이윤복의 삶을 그린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영화를 보면서도 흘러나오는 눈물을 꾹꾹 눌러 참았다. 이젠 모든 걸 감정 그대로 드러낸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도 슬프면 울고, 신문 보다가도 애처로운 기사내용에 글썽이고…. TV 프로그램 ‘가요무대’를 좋아하는데 가슴이 먹먹하게 적셔온다. ‘울고 넘는 박달재’가 나오면 온몸에 필이 꽂힌다.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구절엔 가슴 속이 뻥 뚫린다. 두메촌놈 강원도의 한이랄까, 뭐랄까, 그런 것들이 장마철 붉덩물에 다 떠내려가는 것 같다.”
김진선은 미식(美食) 같은 것을 모른다. 그는 짜장면, 기계국수, 찐빵, 감자, 칼국수, 된장이나 김치찌개류 같은 것들만 좋아한다. 직원들이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영양실조 걸린다”며 피하는 이유다. 그는 요즘도 고향에 가면 맨 먼저 고교 때부터 단골로 다녔던 광신칼국수(033-532-4249)집부터 들른다. 정말 꿀처럼 맛있게 먹는다. 그렇다. 김진선은 누가 뭐래도 ‘영락없는 강원도 촌놈’이다.
▼ 아버지의 웅숭깊은 사랑 ▼ 베트남 주둔지로 날아든 편지 한통, 발신인은 아.버.지.
김진선의 아버지(1912∼1979)는 말수가 적고 속이 깊은 분이었다. 김진선이 행정고시에 합격했을 때도 “고생했다”는 한마디뿐이었다. 취중에라도 경우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묵묵히 어머니 병 수발을 들었고 자식들 밥 짓고 빨래하며 공장에 나가 일을 했다. 자식들에게도 큰소리를 친 적이 거의 없었다. 단 한 번 김진선의 형이 미군구호물자 트럭에서 시레이션을 빼냈을 때만 불같이 화를 냈다. “경우 바르게 살아야지” 하며 회초리를 내리쳤다.
김진선은 그런 아버지에게 상의도 없이 베트남전에 자원했다. 형님한테 뒷수습을 맡기고 아무런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나중에 베트남에 도착해서야 아버지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얼마나 놀랐을까.
어느 날 아버지 편지가 왔는데 구구절절 애틋했다. 켜켜이 쌓인 서러움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 차고 넘쳤다. 김진선은 십자성부대 주둔지 냐짱(나트랑)해변 모래밭에 ‘아버지’라고 써놓고 목 놓아 울었다.
1년 뒤 귀국해서 보니 아버지 얼굴이 ‘폭삭’ 늙어있었다.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얼굴은 온통 주름살투성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형과 내가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재혼’을 권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절대 그럴 수 없다’며 한사코 말도 못 꺼내게 했다. 그때 우리는 ‘그러시다면…’ 하며 순순히 물러섰다. 그런데 내가 나이 먹어보니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하고 가슴이 미어진다. 어머니가 눈감으셨을 때 아버지 연세가 혈기 방장한 오십대 중반이었는데 어린 우리는 아버지를 노인으로만 생각했다. ‘자식들한테 짐이 될까봐’ 그런 거였는데 그걸 우리는 몰랐다. 요즘도 그 생각만 하면 내가 얼마나 불효자식인지 후회막급이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아버지는 1979년 내가 결혼한 몇 개월 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평소 심장쇼크가 있었는데 그것도 자식들에게 숨기신 거였다. 아버지는 서울의 내 신접 셋방에 오셔서 두 밤을 지냈는데 내가 좋아한다고 천도복숭아를 잔뜩 사오셨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고향에 내려가신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가 뼈저리게 그립고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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