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사회를 보다 더 깊게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심층 탐사기획 ‘프리미엄 리포트’를 독자 여러분에게 새로이 선보입니다. 첫 회로 ‘보이지 않는 침묵의 암살자―대한민국 MIU(Men In Uniform·소방관 경찰 군인 등 제복을 입은 공직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S)’을 마련했습니다.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MIU가 극심한 정신적 외상을 입고도 적절한 치료와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실태와 제도적 해법을 2차례에 걸쳐 집중 보도합니다.》
형광등이 깜빡거리자 6.6m²짜리 고시원 방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1인용 침대와 책상, 꼬마 냉장고만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문을 닫자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공간처럼 적막만이 감돌았다. 임수현(가명·40) 경장은 침대에 걸터앉아 탁상용 달력을 봤다. ‘언제 세상으로 다시 나갈 수 있을까.’
그는 2012년 5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S)’과 대인기피증을 진단받아 휴직한 뒤 이곳에 외부와 단절된 둥지를 만들었다. 가족과 떨어져 산 지도 1년 8개월이 넘었다.
악몽이 시작된 것은 3년여 전. 인천○○경찰서 소속이었던 그는 연평도 파출소에서 입출항 장부를 살피고 있었다. 4박 5일 파견 근무를 마치고 육지로 복귀하는 날이었다. 오후 2시 반경 멀리서 들리던 포성이 점차 가까워졌다. “오늘따라 포 소리가 크네요.” 파출소장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 파출소를 뒤흔들었다. 정체 모를 파편이 파출소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철문을 관통하는 위력이었다. 북한군이 쏜 76.2mm 포탄이 파출소 옆 건물에 떨어진 것이었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이었다.
임 경장은 대피소 가장 깊숙한 곳에 숨고 싶었다. 하지만 경찰로서의 의무감에 몸을 움직였다. 그는 주민을 대피시키고, LP가스통이 쌓인 건물에 불이 옮겨붙지 않도록 양동이로 물을 퍼 날랐다. 매캐한 냄새로 숨도 쉬기 어려웠지만 그는 포격이 진행 중인 연평도를 누비며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촬영해야 했다.
악몽은 그날부터 시작됐다. 금방이라도 북한군이 고무보트를 타고 바다를 건너올 것만 같았다. ‘경찰부터 사살한다’는 옛 동료의 얘기가 계속 머리를 빙빙 돌았다. 헤엄을 쳐서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 포성이 더 크게 들렸다. 그는 그 생지옥에서 열흘을 더 보내야 했다.
육지로 돌아온 뒤 찾은 병원에서는 “PTSS가 심각하다”며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권했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가 그를 막았다. ‘정신병자로 보지 않을까?’ 고가의 치료비도 문제였다. 그는 연평도의 기억을 애써 누른 채 시간을 보냈다. 악몽과 환청은 점차 뜸해지는 듯했다.
2012년 2월 경비함에 배치돼 불규칙적인 근무가 시작되면서 환청이 되살아났다. 선실에 누우면 파도 소리가 마치 포성처럼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럴 때면 식은땀이 흐르고 호흡이 가빠졌다. 주변에서는 “해양경찰관이 파도 소리를 무서워하다니…”라며 핀잔만 줬다. 잠결에 환청을 듣고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 동료들에게 “무슨 소리 못 들었느냐”고 물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Post Traumatic Stress Syndrome·PTSS) ::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의 심각한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을 트라우마(Trauma)라고 한다. PTSS는 트라우마가 직접적 원인이 된 일련의 정신질환군(群)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보다 폭넓은 개념이다. 트라우마를 입었던 당시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공포에 시달리고 우울증 공황장애 알코올사용장애 등을 동반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큰 지장을 준다.
▼ “하루새 주검 3구 수습… 16년 악몽의 시작” ▼
기억의 독방에 갇힌 사람들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온라인 게임에 몰두하다 눈도 뜰 수 없을 만큼 피곤해져야 잠들 수 있었다. 자살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가 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목숨을 어떻게 끊었는지 궁금했다.
“인천에 있으면 언제 북한군이 쳐들어올지 몰라. 애들하고 대전 친정집에 내려가 있어.” 아내는 임 경장의 신경과민을 묵묵히 받아줬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휴직을 권했다. 주변의 핀잔 속에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 휴대전화를 없애고 외출할 때 항상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2012년 5월 휴직계를 내고 인천에 고시원을 구했다. 세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마저 버거웠기 때문이다.
연평도의 기억을 떨쳐내는 데 1년이 넘게 걸렸다. 매일 산에 오르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턱걸이를 했다. 목덜미를 따라 땀이 흐르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 닦인 등산로를 따라 걷다보면 낯선 사람을 대할 용기가 생겼다. 수요일마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치료는 복잡하지 않았다. 의사에게 실컷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됐다. 다시 근무복을 입을 수 있을 만큼 상태가 호전됐다. 의사는 ‘복직에 무리가 없다’는 소견서를 내줬다.
이달 초 그는 1년 8개월 만에 복직했다. 임 경장은 “설렘과 불안이 반반이지만 다시 세상으로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스스로 대견해했다.
● ‘간첩’을 보는 아들
“너, 나한테 ‘간첩’이라고 한 거 기억나나?”
지난해 12월 12일 서울 송파구 성동구치소 남자접견실 3호실. 어머니(67)가 아들 박모 씨(41)에게 말을 건네자 아들이 어머니의 눈을 피했다.
“나오면 정신 차리고 잘 살아보자. 그거밖에 엄마는 할 말이 없다.”
“알았어. 내가 생각 안 하면 돼. 생각 안 하면 되니까….”
어머니는 다짐을 받고 또 받았다.
박 씨는 참수리 ○○○호의 중사였다. 1999년 6월 15일 오전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벌어진 제1연평해전의 한가운데에 박 씨가 탄 참수리 호가 있었다.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온 북한군은 참수리 호를 향해 AK소총을 쐈다. 총알 한 발이 박 씨의 아랫배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북한의 어뢰정 1척은 침몰했고 420t급 경비정 1척도 많이 부서졌다. 북한군은 20여 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 측 전사자는 없었고 7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해 7월 7일 박 씨는 표창장을 받았다. 승리한 전투였다.
하지만 박 씨의 전투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승리는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는 2000년 8월 만기 전역했다. 그때부터였다. 박 씨의 눈에 자꾸만 ‘간첩’이 보였다.
지난해 11월 18일 오후. 잠에서 깬 박 씨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허공을 향해 “간첩이다”라고 소리쳤다. 어머니는 “간첩이 어디 있다고 그래”라며 아들을 다독였다. 정신이 들었을까? 박 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버릇처럼 술을 찾았다. 소주 4병을 들이켰다. 박 씨는 또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이번엔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했다. “죽여버린다”고 소리쳤다.
소란은 경찰이 집에 온 뒤에야 겨우 진정됐다. 경찰은 “술이 깨도록 아들을 찜질방에 보내라”고 했다. 박 씨는 돈 1만 원을 갖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박 씨는 이내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머니가 문을 잠그고 잠시 밖에 나갔다. 집에 들어가지 못한 박 씨는 전단지에 불을 붙여 자신의 방 창문을 열고 방안으로 던졌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유치장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방화 혐의로 구속됐다. 박 씨는 “그날 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찰서에서 내가 불을 질렀다는 말을 듣고 황당했다”고 했다.
14년 가까이 지겹도록 이어지는 꿈. 그 속에서 그는 언제나 참수리 ○○○호 갑판에 서 있었다. 주변엔 온통 북한군만 있을 뿐이다. 제2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사건, 연평도 포격 사건…. 북한의 도발은 지겹도록 이어졌다. 그때마다 꿈은 더욱 잦아졌다. 술에 취하면 “간첩이다, 저 새끼들 다 죽여야 한다”며 ‘다다다’ 총 쏘는 소리를 냈다. 무당을 찾아가 한 번에 500만 원 하는 굿도 6차례나 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동안 4번이나 자살 시도를 했다. 전역한 후 1년쯤 지났을 때는 신발과 휴대전화를 모래사장에 남겨둔 채 바다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2월경에는 8층 아파트 발코니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했다. 뒤에서 끌어안은 어머니가 없었다면 어찌됐을지 모른다. “왜 죽으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박 씨는 10일 첫 재판을 받는다.
● 악몽이 시작된 그날
인천 ○○소방서의 김모 소방장(44)에게 1997년 8월 어느 날은 ‘참 특별한 날’이었다.
소방관 길로 접어든 지 3년여 지난 시기였다. 인천제철 용지 공사 현장에 출동을 나갔다. 지름 20m, 깊이 3m 정도 되는 웅덩이에 빗물이 가득 차 있는데 아이 하나가 빠졌다. 출동하자마자 김 소방관은 웅덩이에 뛰어들었다. 잠수해서 어두운 흙탕물을 휘젓는데 아이의 팔뚝이 잡혔다. 부들부들하면서 서늘한 느낌이 섬뜩했다. 그 순간의 촉감을 그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소방관 생활 3년 만에 경험한 첫 시체였다. 아이를 꺼내 담요로 덮고 병원까지 옮겼다. 의사는 “사망한 지 한참 됐다”고 했다. 닭살이 돋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돌아와서 한두 시간 지났을까. 그는 또 다른 출동을 나갔다. 한 40대 남성 인부가 배 연료통에 빠져서 사망한 사고였다. 꺼내진 시체를 보니 온몸이 기름 범벅이었다. 눈에도 얼굴에도 몸 전체에도…. 이미 기름이 목과 폐에 다 들어가 사망한 상태였다. 섬뜩했다. “참 희한한 날일세.”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날 밤 12시가 넘은 깊은 밤. 한 건의 신고가 더 들어왔다. ‘아이가 숨을 안 쉰다’는 것이었다. 49.5m²짜리 작은 빌라에 도착해 보니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있었다. “침대에서 같이 자다 그랬어요. 어떡해요.” 돌이 안 된 갓난아이였다.
갓난아이는 팔과 다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안았는데 아무런 힘이 없이 축 늘어졌다. 그 촉감. 지금도 기억나는 그 촉감. 부들부들한 촉감.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이 아이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16년도 넘은 일이지만 그는 아직도 그날 생각이 난다. 아이들 얘기만 하면 그날이 떠오른다. 그날 이후 잠을 제대로 못 자기 시작했다. 선잠을 자면서 악몽을 꿨다. ‘아이를 살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계속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족에게도 이야기를 못했다. 속으로 혼자 끙끙 앓았던 거다. 그는 올 6월에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검사를 받은 뒤 ‘위험군’ 판정을 받고 7월부터 5차례 치료를 받았다.
그는 14세, 15세 두 아들을 두고 있다. 특이한 경험 때문에 아이들을 끔찍이 챙겼다. 위험한 곳은 사전에 피하게 하고,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도 꼭 보호대를 착용하게 했다.
그는 괜히 짜증이 나거나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무기력해질 때도 있다. 아내한테도 제대로 얘기하질 못한다. “관두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자긍심으로 버틴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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