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은택]영문 모를 광풍에… 고교생들만 상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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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파문 확산]

이은택 기자
이은택 기자
경북 청송군 청송읍 월막리 방광산 자락에 있는 청송여고는 작은 학교다. 전교생 140명에 학년당 2개 학급뿐이다. 지난해 졸업생은 47명. 학부모들은 청송읍 일대에서 대부분 농사를 짓는다. 최근 청송사과가 유명해진 뒤로는 사과 재배로 벌이가 좀 늘었다는 농가도 몇 있다.

이 작은 시골학교가 지난 사흘간 광풍(狂風)의 한가운데에 섰다. 우(右)편향 서술 논란이 일었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채택했다는 이유에서다. 청송여고는 포털 검색어 1위에 올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학교에 대한 비난과 옹호가 번갈아가며 쏟아졌다. 학교에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취재진이 몰렸다.

학부모들이 교학사 교과서를 반대하는 의견을 내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지난해 11월 교육부는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의 오류 조사 결과를 내놨다. 교학사 교과서는 총 251건으로 다른 교과서보다 2∼4배 오류가 더 많았다. 검정을 통과했지만 집필 과정의 완결성이 다른 교과서에 비해 떨어져 보인다. 사과로 비유하면, 아이들이 먹어도 건강에는 이상이 없지만 가장 맛이 좋고 영양가가 많은 사과는 아닌 셈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그저 먹을 수 있는 사과가 아니라 가장 달고 영양가 많은 사과를 먹이고 싶은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문제는 청송여고 학부모들이 아니라 외부에서 반대하는 이들이 의견을 드러낸 방법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진보성향 시민단체, 일부 누리꾼의 방식은 폭력적이었다. 청송여고가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간 7일 학교는 마비됐다. 교무실과 교장실에 신분을 밝히지 않은 이들의 비난 전화가 쇄도했다. 학교 앞에는 ‘친일’ ‘독재 미화’ 등 살벌한 단어를 내건 피켓 시위가 등장했다. 박지학 교장은 기자를 만나 “난생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심장이 벌렁벌렁했다”며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교과서가 편향됐고 불의(不義)하다”며 항의하는 이들의 방식은 정의롭지 못했다.

광풍의 한가운데서 남모르게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은 청송여고 학생들이다. 방학 중에도 학생들은 보충수업을 받으러 등교했고 그때마다 취재진과 낯선 어른들, 비난 문구가 적힌 피켓을 목격했다. 모교를 향해 쏟아지는 온갖 출처 모를 비난의 글들도 읽었을 것이다. 9일 등굣길에 만난 3학년 학생은 “안 좋은 일로 인터넷과 뉴스에 학교 소식이 도배돼서 무서워요. 어떻게든 빨리 해결돼서 학교가 예전처럼 조용해지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사건은 일단락됐고 3월 새 학기가 시작된다. 학교를 뒤흔든 수많은 사람들은 사라질 테지만 학교는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채 남았다. 이 과정을 지켜본 아이들은 어떤 마음일까. 수업시간에 다시 예전과 같은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볼 수 있을까. 다시 밝게 웃으며 교장 선생님께 인사할 수 있을까. 10년, 20년 뒤 학창 시절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야 할 모교가 상처투성이인 기억으로 남는다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지 곱씹어 봐야 한다.

청송=이은택·사회부 nabi@donga.com
#청송여고#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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