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구 국회의원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회기 중인데도 구의회가 텅 비어버렸다.”
민주당 소속 수도권의 한 구청장이 국회의원과 기초의원의 ‘갑을(甲乙) 관계’를 설명한 단적인 사례다. 기초의원에게 구의회보다는 공천권을 쥐고 있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경조사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또 다른 구청장은 “지역에서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아도 ‘직속상관’이나 다름없는 지역구 국회의원과 사이가 틀어지면 다음번에 공천을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여부는 정치권의 해묵은 숙제다. 밀실공천, 지방의 중앙정치 예속 등을 이유로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있어 왔다. 2012년 대선 때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앞다퉈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공약하기도 했다. 정당공천권은 지역구 국회의원이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 무기다. 그럼에도 ‘정당공천’이라는 여과장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참신한 정치 신인보다는 지방 토호들이 판을 칠 멍석만 깔아준다는 얘기다. 그만큼 민감한 이슈라는 얘기다. ● 새누리 의원 44%, “기초선거 공천 폐지해야”
동아일보 조사 결과 새누리당은 89명 중 44명(49.4%)이 “정당공천을 유지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정당공천을 폐지해야 한다”고 한 의원도 39명(43.9%)이나 됐다. 지도부는 공천제 유지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반대 의견도 적지 않은 셈이다.
특히 3선 이상 중진 의원들은 11명이 “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한 5선 의원은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대선 공약은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11월 대선 공약 발표 때 “기초자치단체의 장(長)과 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을 폐지하겠다”고 밝혔던 만큼 대국민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지난해 7월 전(全) 당원 투표를 거쳐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당론으로 확정했지만, 조사에 응한 73명 중 18명(24.7%)은 “공천제는 유지돼야 한다”고 답변했다. 그 이유로는 △정당의 책임정치 구현(8명) △여성 및 소수자 진출 도모(3명) 등을 꼽았다. 수도권의 한 재선 의원은 “공천은 안 하더라도 지지 후보를 숨긴 채 내천(內薦)한다면 국민을 속이는 사기극 아니냐”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정의당 등 소수 정당은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기초선거 공천 폐지를 공약으로 발표했을 때부터 일관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해왔다.
전문가들의 견해도 엇갈린다. 안성호 대전대 교수(행정학과)는 “유능한 사람이 공천받는 게 아니라 국회의원이나 지역위원장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공천을 받고 당선되는 사례가 많다”며 “정당과 지방의회 간 균형, 견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지방자치의 질적 하락을 야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연주 성신여대 교수(법학과)는 “우리 헌법은 지방선거도 정당이 국민의 의사를 대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정당공천제 폐지는 위헌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 여론은 폐지 쪽이 높다. 동아일보 여론조사(지난해 12월 28, 29일 실시)에서 ‘폐지’ 의견은 51.6%였고 ‘유지’ 의견은 31.7%였다. SBS 조사에서는 ‘폐지’ 55.7%, ‘유지’ 29.5% 등으로 나타났다.
● 광역단체장-교육감 러닝메이트제, 찬반 팽팽
새누리당이 제안한 광역단체장-교육감 후보자 러닝메이트제 도입에 대한 여야 의원들의 의견은 찬성(49.4%·81명)과 반대(43.5%·70명)가 팽팽했다.
새누리당은 76.4%(89명 중 68명)가 찬성했다. 새누리당 중진 의원은 “교육감 선거가 더이상 ‘묻지 마 투표’로 가서는 안 된다. 유권자를 위해서라도 교육감의 이념적 정체성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새누리당의 제안에 대해 “교육의 정치 예속화가 심화될 우려가 있다”고 공식 반대했지만, 응답자 73명 가운데 13명(17.8%)은 찬성한다고 답했다. 민주당의 한 수도권 중진 의원은 “주민자치에 교육자치를 연계할 필요가 있다”며 “광역단체장과 교육감의 코드, 손발이 맞아야 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이 내놓은 특별·광역시 기초의회(구의회) 폐지 방안에 대해 민주당은 89.0%(73명 중 65명)가 반대했다. 민주당의 한 3선 의원은 “새누리당이 불쑥 기초의회 폐지론을 들고 나온 것은 기초선거 정당공천제를 유지하기 위한 물 타기용”이라고 비판했다. 새누리당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25.8%(89명 중 23명)나 나왔다. 한 재선 의원은 “헌법 118조 1항은 ‘지방자치단체는 의회를 둔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기초의회 폐지는 헌법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답변 유보’도 14.6%(13명)였다.
● 정개특위도 교통정리 안 돼
여야는 지난 대선 때 정치개혁 차원에서 꺼낸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공약을 논의하기 위해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가동했다. 이달 31일까지 개선안을 마련하겠다는 시간표도 제시했다. 정개특위가 개선안을 내놓으면 여야는 의원총회를 거쳐 국회 차원의 제도 손질을 마무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정개특위 내에서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조사에 응한 새누리당 의원 5명 중 3명은 “정당공천제 폐지는 책임정치를 못 박고 있는 헌법에 위배된다”며 반대했고, 2명은 답변을 유보했다. 민주당 의원 7명 중 6명은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며 폐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명은 “여성의 정계 진출이 어려워질 것”이라며 현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속 정당에 따라,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의견이 쪼개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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