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파는 죽지 않는다 다만 모습을 바꾸어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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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년 1월 12일 14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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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사는 다양한 파벌의 흥망성쇠사…올 지방선거 앞두고 또 다른 이합집산 시작

“‘친박’(친박근혜)과 ‘친노’(친노무현)의 적대적 공생이었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은 2013년 한국 정치를 이렇게 진단한다. 돌이켜보면 한국 정치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한국 정치의 거의 전부였던 시절부터 친노, 친이(친이명박), 친박 등 다양한 파벌의 흥망성쇠 역사다.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 정치계보가 어떤 이합집산에 나설지도 자못 궁금하다. 대통령선거(대선) 패배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문재인 민주당 의원을 중심으로 한 친노 세력도 대선 1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기지개를 켠다. 이에 ‘주간동아’는 한국 정치사에서 계파와 파벌이 어떻게 형성됐고,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조망해봤다. <편집자>

2009년 12월 1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6·3동지회, 4·19동지회, 민추협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보고싶은 사람들’ 송년모임이 열렸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상현,이기택,김덕룡,최형우,김무성,정대철,이부영 등이 주요 
참석 인사(왼쪽). 1986년 7월 17일 신민당 내 동교동계 의원 모임인 민권회의 간담회 모습.
2009년 12월 1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6·3동지회, 4·19동지회, 민추협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보고싶은 사람들’ 송년모임이 열렸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상현,이기택,김덕룡,최형우,김무성,정대철,이부영 등이 주요 참석 인사(왼쪽). 1986년 7월 17일 신민당 내 동교동계 의원 모임인 민권회의 간담회 모습.

계보 또는 계파라는 말을 들을 때 바로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조선시대 사색당파나 지금까지 우리 정당사에서 끊임없이 명멸했던 다양한 형태의 정당 파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사색당쟁은 우리나라 계파정치의 대표 사례로, 파벌이나 계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치계파는 유력 정치인을 중심으로 존재하는 집단으로, 구성원은 리더의 정치적 영향력에 의해 충원된다. 계파 구성원은 국회나 당내 투쟁에서 리더를 적극 지지하고, 리더는 추종자에게 당직과 공천을 제공한다. 이 같은 계파 정치는 합리성이 강조되는 미국과 유럽보다 인간적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 일본 정치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 정치계파는 일제강점기 중국이나 미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단체나 인물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1920년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에선 27개 정당과 사회단체가 난립해 최악의 파벌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우리 손으로 정치를 담당하게 된 이후에도 다양한 정치파벌이 때로는 인물을 중심으로, 때로는 이념을 중심으로 합종연횡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해방 정국이 정치계파에 의해 좌우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민주당은 사실상 여러 지연과 학연을 배경으로 한 계파 정치 연합체로 출발했다. 이후 민주국민당(민국당), 민주당, 민중당, 신민당으로 이어지면서 야당 계파의 갈등과 대립은 계속됐다.
조병옥, 장면, 신익희(왼쪽부터).
조병옥, 장면, 신익희(왼쪽부터).


인간적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

우리 정치사에서 계파는 여당, 야당을 떠나 오랫동안 존재했으나 여당보다 야당에서 더 두드러지게 부각됐다. 그 이유는 여당의 경우 현직 대통령의 강력한 통제력에 의해 모든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또 당내의 다른 목소리나 활동을 통제할 채찍과 장관직, 공천권 등 당근도 갖고 있어 계파 정치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친이와 친박의 계파 갈등이다. 야당 시절부터 이어져온 친이와 친박의 대립은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계속됐다. 2008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공천에서 친박계가 공천 학살을 당한 뒤 박근혜 당시 의원은 “약속과 신뢰가 지켜지기를 바랐지만 결국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친이계 당 지도부를 겨냥했다.

공천 전 친박계 위주의 ‘살생부’가 나돌았다. 김무성, 김기춘, 이강두, 이인기, 엄호성, 유기준, 김태환, 김재원, 한선교 등이 줄줄이 낙천의 고배를 들었다. 서청원, 홍사덕, 이규택 등 친박계 일부는 박근혜 이름을 딴 ‘친박연대’를 만들어 총선을 치렀다.

4년의 세월이 흐른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친박계가 칼자루를 잡았다. 이번엔 친이계가 칼날에 베여 피를 흘렸다. 안상수, 진수희, 이방호, 안경률, 신지호, 진성호 등 친이계 대다수가 몰살됐다. 친이계 좌장격인 이재오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감정적, 보복적 공천을 하지 마라”며 날을 세웠지만 그 칼날은 이미 무뎠다.

야당인 민주통합당(현 민주당)의 계파 갈등도 한나라당 못지않았다. 공천에서 문재인과 한명숙을 중심축으로 한 친노계가 약진했고, 박지원으로 대표되는 호남 중심의 옛 민주계는 힘을 쓰지 못했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에서 계파의 성립과 대립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해방 정국부터 치열하게 전개된 계파 정치는 1955년 이승만 정권의 사사오입개헌에 대한 반발로 출범한 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본격화된다.

당시 민주당 창당에는 신익희와 조병옥이 이끄는 민국당을 주축으로 장면, 정일형 등 흥사단계, 현석호와 김영삼 등 원내 자유당계, 조선민주당계와 무소속구락부, 대한부인회 박순천이 참여했다. 민주당은 창당대회에서 신익희, 조병옥 중심의 구파와 장면, 박순천 중심의 신파가 막후조정을 통해 최고위원 등 주요 당직을 철저히 5대 5로 안배했다. 배분 과정에서 계파 갈등은 불가피했다.



4·19혁명 후 치른 1960년 5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계파 간 치열한 경쟁 끝에 신파 113명, 구파 108명의 공천을 확정했다. 양 계보와 관계없는 후보는 6명뿐이었다. 공천이 발표되자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은 제각기 소속 계보의 이름으로 ‘신파 공천’ ‘구파 공천’을 내세워 입후보했다. 그야말로 ‘사천(私薦)‘이었다. 신파 공천 지역 가운데 55곳에서 구파 지원을 받은 후보가 입후보했고, 신파는 구파 공천 지역 26곳에 후보를 내세워 지원했다.

총선이 끝난 뒤 당선자 대회도 별도로 열었다. 구파의 ‘아서원 대회’에는 95명, 신파의 ‘대명관 대회’에는 85명이 참석했다. 이러한 도를 넘는 계파경쟁으로 민주당 정권은 약화됐고, 결국 5·16 군사쿠데타를 맞게 된다.

1970년대 신민당에서는 중도통합론의 이철승과 선명야당을 내세운 김영삼(YS) 사이에서 당권과 공천권을 둘러싼 대립 및 갈등이 치열했다. YS와 김대중(DJ) 계파도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대립 양상을 보인다. 당초 YS는 민주당 구파에서, DJ는 민주당 신파에서 출발했으나 그 후 각 자택 소재지를 따라 상도동계, 동교동계로 불렀다.


YS와 DJ 그리고 민주화의 봄

양 계파는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맞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구성했는데, 1985년 12대 총선에서 민추협은 이철승, 김재광, 이기택 등 ‘비민추협’ 인사들과 신한민주당을 창당한다. 관제야당인 민주한국당을 붕괴시킨 이 총선에서 민추협과 비민추협은 계파 안배 원칙에 따라 철저하게 공천을 안배했다.

YS와 DJ는 독재정권에 맞설 때는 손을 맞잡았지만 대권을 눈앞에 둔 결정적 순간에는 늘 대립했다. 1980년 ‘민주화의 봄’ 정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87년 6월 항쟁 직후의 13대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통일민주당의 양 계보는 대선후보로 YS와 DJ 중 누구로 할 것인지를 놓고 갈등하다 ‘분당(分黨)’했다. 한 지붕 두 가족이던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민주세력의 단일화 요구를 끝내 외면했다.

결국 YS와 DJ는 ‘적과의 동침’을 통해 대권을 잡았다. YS는 정적이던 박정희의 후예 김종필(JP)과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와의 ‘3당 합당’을 통해 대통령이 됐고, DJ 역시 ‘권력 나눠먹기’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DJP 연합’으로 집권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셈이다.

이합집산은 정치계파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대선을 치르고 1여 년가 지난 지금, 민주당내 친노도 재편 움직임을 보인다.

친노 좌장은 누가 뭐라 해도 대선캠프 인사를 중심으로 의원 40여 명을 거느린 문재인 의원이다. 문 의원 곁에는 전해철, 박남춘, 박범계, 장병완, 이용섭 의원 등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와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던 인사들이 포진해 있다. 문 의원은 대선 재도전 의사를 거듭 밝히면서 친노 진영의 재결집을 꾀한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적자’로 불리는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안 지사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김윤덕, 박수현 의원 등을 앞세워 친노 진영의 또 다른 축으로 성장할 개연성이 높다는 게 당내 중론이다.

민주당 전신인 열린우리당의 대표를 두 번 지냈고, 민주당 대표까지 지낸 정세균 전 대표도 강기정, 김진표, 박병석, 신장용, 전병헌, 최재성 등 20여 명 안팎의 계파 의원을 거느리고 있다.

비노로 분류되는 손학규 전 대표는 원외 인사지만 여전히 원내의원 10여 명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2010년 당대표 시절 보좌했던 인맥과 경기를 비롯한 수도권, 그리고 호남 일부 인맥이 축을 이룬다.

고(故) 김근태 상임고문의 가치와 노선을 따르는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는 원내의원 16명이라는 적지 않은 계파를 형성했지만 의견 통일이 전혀 되지 않고 있다. 대선후보나 원내대표 경선 때마다 누구를 지지할지 의견을 모으지 못했다. 문재인계와 손학규계 등 계파가 혼재해 있기도 하다.

친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누가 ‘포스트 박근혜’가 될 것인지를 놓고 친박계도 벌써 ‘각자도생(各自圖生)’을 모색한다. 올해 당권이 교체되는 새누리당에선 이미 ‘누가 서청원계냐, 누가 김무성계냐’ 하면서 설왕설래한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내가 박근혜 대표를 돕는 것이 아름다운 행위”라며 전폭적으로 지원사격을 했던 서청원 의원 계파에는 18대 총선 공천 당시 친박연대로 출마한 김을동, 이우현, 조원진, 노철래 의원이 속해 있다. 서청원 의원 측은 박 대통령 의중이 김무성 의원보다 자신들에게 있다고 자신한다. 서 의원의 재·보궐선거 공천에 반대한 김성태, 박민식, 조해진, 이장우 의원은 ‘반서청원’으로 분류된다.
2008년 4월 16일 서울 여의도 친박연대 사무실에서 서청원 대표(가운데)와 18대 친박연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08년 4월 16일 서울 여의도 친박연대 사무실에서 서청원 대표(가운데)와 18대 친박연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파벌은 정치를 배신한다

근현대사역사교실이라는 역사공부 모임을 만들어 의원 100여 명을 회원으로 끌어들인 김무성 의원도 계파 성립의 근거를 마련했다. 특히 2013년 11월 토론회에 참석한 서병수, 안종범, 나성린, 정희수, 이한성, 원유철, 이만호, 민현주 의원이 김무성계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김무성 의원은 얼마 전 민주당 원혜영 의원, 정의당 심상정 의원과 함께 고령화사회 연구모임인 ‘퓨처라이프 포럼’도 출범했다. 여야 의원 43명과 외부 전문가 그룹 34명이 참여하고 있다.

충청권의 새로운 리더로 떠오르는 이완구 의원이 주도해 2013년 12월 만든 ‘국가경쟁력 강화모임’도 주목받는다. 유기준 최고위원이 총괄간사를 맡고 홍문종 사무총장,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 김재원 전략기획본부장 등 지도부급 친박계 의원이 가입해 무게감과 결속력이 상당하다는 평이다. 충청권을 중심으로 한 친박계 의원의 ‘알짜캠프’로 굳어질지 주목된다.

비박으로 분류되는 이재오, 정몽준, 이인제 의원과 김문수 경기도지사도 자기 나름대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이재오 의원은 “이제 개헌을 통해 내용적 민주주의를 성숙시켜 다음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며 개헌 공론화를 통한 입지를 모색한다. 정몽준 의원의 경우 당 안팎에서 꾸준하게 서울시장 출마설이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과 대선후보 경선에서 경쟁했던 김문수 경기도지사도 최근 여의도 복귀 시나리오를 짜는 것으로 알려졌다. 충청권 6선으로 선진통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말을 갈아탄 이인제 의원은 ‘통일을 여는 국회의원 모임’을 이끌며 다시 한 번 기회를 엿본다.

계파는 자신이 몸담은 권력이 저물기 시작하면 미래 권력을 향해 우르르 몸을 옮긴다.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의 주류인 민정계에서 다수가 YS 쪽으로 이동하며 ‘신민주계’가 형성됐다. 박근혜가 대세론을 만들어가자 당내 친이계 움직임과 관련해 ‘월박’(越朴·친박으로 넘어감), ‘주이야박’(晝李夜朴·낮에는 친이, 밤에는 친박), ‘공이만박’(空李滿朴·친이는 비고 친박은 가득 참)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정치는 파벌을 낳고 파벌은 정치를 배신한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된 역사였다. 올해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다시 계파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여야 정치계파가 또 어떤 이합집산을 거듭할지 자못 궁금하다.

이영훈 동아일보 기자,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저자 leejin97@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4년 01월 14일자 92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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