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관련국 간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기보다는 상대방에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는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62)은 지난해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수천 명이 강제노역을 했던 하시마(端島·군함도) 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추천한 데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보코바 사무총장은 지난해 12월 16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한중일 간 과거사 논쟁과 영토 분쟁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꽉 막힌 정치 외교적 문제일수록 문화적 접근 방식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가 2013년 9월 30일 규슈(九州)와 야마구치(山口) 현의 근대화 산업유산 28곳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신청했고 유네스코는 현지 조사 등을 거쳐 2015년 최종 등록할지를 결정한다. 그런데 후보 유적지는 대부분 일제강점기 한국인 수천 명이 강제노역을 했던 조선소, 해저탄광 등이다. 일본엔 메이지(明治) 시대의 유산일 수 있지만 한국 등 주변국에는 상처가 어린 곳이다.
“우선 이것은 유네스코 산하 세계문화유산위원회가 종합적으로 검토해 결정할 사안이라는 걸 말하고 싶다. 다만 사무총장으로서 강조하고 싶은 가이드라인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기본적으로 관련국을 분열과 갈등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통합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가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주변 국가 간에 분열의 불씨가 되는 사례를 종종 본 적이 있다.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이웃 국가에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분쟁이 있던 나라 간에 대화와 친교를 증진시키고 공통의 역사인식을 공유하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한중일 간에는 과거사 논쟁과 갈등이 심각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의 아픔을 겪은 독일과 프랑스처럼 동북아 차원의 공동 역사교과서를 발간하자고 제의한 바 있다. 유네스코는 1964년부터 1999년까지 ‘통합 아프리카 역사’ 발간을 주도했는데….
“역사 분쟁이 있던 국가끼리 과거사 인식을 공유하는 것은 평화로운 미래협력을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다. 유네스코 방콕사무소에서는 2013년 9월부터 동남아시아의 문화협력을 촉진하는 ‘공동역사 발굴’ 사업을 시작했다. 유네스코는 또 타자의 문화와 역사를 인정하고 평화와 인권을 존중하며 기후변화와 같은 지구적 과제에 협력할 줄 아는 ‘글로벌 시민교육’을 강조해왔다. 한중일 3국도 각국의 유네스코 무형유산센터를 통해 역사적 정체성을 이해하고 협력관계를 만드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유네스코가 적극 나서겠다.”
1946년 2차 대전 종전 직후 설립된 유네스코는 국민 간의 상호 이해와 문화 보급으로 항구적인 세계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국제기구로 ‘세계 지성의 리더’ 역할을 해왔다. 불가리아 외교장관 출신인 보코바 사무총장은 2009년 유네스코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수장으로 선임됐다.
유네스코는 2011년 11월부터 극심한 재정위기에 시달려왔다. 미국이 국내법상 팔레스타인을 회원국으로 승인한 국제기구에는 지원금을 낼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유네스코 1년 예산의 22%에 이르는 납부액을 3년째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보코바 총장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민간협력 프로젝트 개발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2013년 11월 총회에서 두 번째 임기(4년)의 사무총장으로 재선됐다. 그는 다음 달 2∼5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다.
―유네스코의 파산위기를 극복한 비결은….
“2년간 마른 수건을 짜는 혹독한 구조조정과 비용 절감에 나섰다. 그러나 유네스코의 주요 사업까지 포기할 순 없었다. 대안은 민간기업과의 적극적인 협력개발이었다. 지난 2년간 개발도상국의 여성교육, 과학연구, 교사연수 등의 프로젝트에 민간이 기부한 액수는 5000만 달러(약 527억 원)에 이른다. 회원국의 특별분담금으로 신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희망브리지’ 사업을 진행해준 한국 정부와 기업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지난해 미국은 유네스코 총회에서 표결권을 잃었다. 미국이 다시 유네스코 부담금을 낼 가능성은….
“미국은 여전히 유네스코의 회원국이자 집행이사국이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나에게 표결권 상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유네스코에 지속적인 참여와 지지를 약속했다. 세계의 지성인과 오피니언 리더들의 모임인 유네스코에 참여하는 것은 미국의 국제적 이익에도 중요하다.”
―유네스코에 한국이란 어떤 존재인가.
“약 1년 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를 찾았을 때 1950년대 초등학교 시절에 자신이 배웠던 교과서를 기증해 감동받았다. 반 총장이 가져온 교과서의 뒷면에는 ‘유네스코가 지원한 시설과 종이로 인쇄했다’는 내용이 영어로 적혀 있었다. 유네스코는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교육 분야 지원으로 재건을 도왔다.
요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아프리카 교사 기술연수, 청년 직업교육 등 ‘희망브리지’ 사업을 펴고 있다. 삼성 등 기업도 유네스코와 적극 협력하고 있다.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교육의 힘으로 나라를 재건한 경험을 개발도상국들에 나눠줄 수 있는 유일한 국가다. 한국의 리더십을 기대한다.”
보코바 사무총장은 자신의 두 번째 임기 중 가장 중요한 과제로 2015년 인천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교육자대회’를 꼽았다. 2000년에 세운 밀레니엄 교육개발 목표를 평가하고 2015년 이후 20∼30년 동안 추구할 지속가능한 새 교육개발 어젠다를 설정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2000년 세네갈 다카르 회의에서 채택됐던 밀레니엄 교육개발 목표는 글로벌 기초교육 보급운동인 ‘모두를 위한 교육(Education for All)’이었다.
―2015년 이후의 밀레니엄 교육개발 목표에서 가장 중요한 비전은 무엇인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사회에서 불평등 격차가 더욱 커졌다. ‘포스트 2015년’의 지속가능한 개발 목표에서 가장 중요한 어젠다는 ‘소프트 파워’라고 생각한다. 문화는 그 핵심 역할을 한다. 21세기에 문화는 더이상 ‘돈 낭비’가 아니며 차세대 글로벌 경제를 이끌 창조적 지식산업의 원천이다. 문화는 엘리트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며 집단 구성원을 소통시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매개체이다. 소프트 파워야말로 사람들을 글로벌 세계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힘이다.”
―유네스코는 지난해 11월 ‘창조 경제’에 관한 리포트를 발표했다. 유네스코가 말하는 ‘창조 경제’란 무엇인가.
“‘창조 경제(creative economy)’가 성공하려면 우선 ‘창조 사회(creative society)’가 성숙돼야 한다. 인간은 기계나 로봇이 아니다. 인간은 시키는 대로가 아니라 스스로 창조성을 발휘할 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창조 경제라고 해서 게임, 애니메이션, 영화산업만 생각해선 안 된다. 인문학 진흥과 문화예술교육 확대를 통해 ‘창조 사회’의 분위기를 성숙시켜야 한다. 사람들이 문화유산과 정체성에 관심을 갖다보면 정신세계가 크게 열리게 된다. 어린이들에 대한 문화예술교육이 꼭 화가나 배우만 키우려는 것은 아니다. 문화예술교육을 받은 어린이는 더 창의적인 자연과학자, 정치인, 경영인이 될 수 있다. 지난해 파리에서 만난 박근혜 대통령도 국정과제의 중심으로 문화의 역할을 강조하는 걸 보고 깊이 감명받았다.” <이리나 보코바 사무총장 약력>
1952년 불가리아 출생 1976년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대학원 국제관계학 석사 1989년 미국 메릴랜드대 행정대학원 수료 1990년 불가리아 사회당 당원 1996∼97년 불가리아 외교장관 1997년 유럽정책포럼 이사 1999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수료 2009년 유네스코 첫 여성 사무총장 선임 2013년 유네스코 사무총장 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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