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9월 미국 뉴욕 시 퀸스 플러싱 뉴욕과학관에서 열린 ‘월드 뉴욕 메이커 페어’ 행사장. 전시업체 관계자가 3차원(3D) 영상을 컴퓨터에 입력하자 3D프린터에서 플라스틱과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작은 모형 제품이 몇 분 만에 뚝딱 나왔다. 그는 “3D프린터 가격이 떨어지고 있으니 구입해 집 안에 ‘공장’ 하나를 들여 놓으라”며 관람객들을 유혹했다. 제조업이 살아나고 있는 미국에서는 요즘 컴퓨터 스캐너, 3D프린터, 레이저 커터 등의 디지털 제조 기술을 활용해 원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제조자 운동(Maker Movement)’ 열풍이 불고 있다. 이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전시회(CES)에는 3D프린팅 독립 전시관도 처음으로 등장했다. 정보기술(IT) 매체인 와이어드의 크리스 앤더슨 편집장은 “1990년대 IT 혁명에 이어 제조자 운동이 세계 경제를 바꿔 놓을 새로운 산업혁명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 제조업 판도 바꾸는 ‘디지털 제조’
독일 최대 전자전기 제조회사인 지멘스는 이달부터 가스터빈 부품을 3D프린터로 제조할 계획이다. 이 회사는 “3D프린터 기술로 평균 44주 걸리는 수리 기간을 4주로 줄이고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항공기 제조업체인 미국 GE애비에이션도 2016년부터 연료분사 장치를 3D프린터로 제조하겠다고 밝혔다. 일부 마니아층의 취미 활동으로 시작된 디지털 제조 기술이 전통 제조업의 지형마저 바꾸고 있는 것이다.
제조자 운동은 유통 시장과 일자리도 바꾼다. 소득이 늘수록 대량생산 제품보다 디자인이나 예술적 감성이 뛰어난 공방(工房) 제품을 원하는 소비자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 소재의 ‘엣시(Etsy)’는 전 세계 공방들이 제작한 각종 제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장터. 2005년 설립돼 지난해 거래액이 1조 원을 넘어섰다. 엣시의 미국인 판매자 중 88%가 여성이며 97%는 가정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가내수공업자다.
○ ‘죽음의 계곡’을 넘는 제조업 허브 육성
지난해 열린 독일의 해외 공관 대사 회의의 주제는 차세대 제조업 육성 전략인 ‘인더스트리 4.0’. 정보통신기술(ICT)과 기계 산업을 접목해 사람의 손이 덜 가는 자동 생산 체계를 구축하고 제조업의 생산성을 30% 끌어올리는 국가 전략이다. 인구 고령화와 생산인구 감소, 미국과 일본 제조업의 부활, 한국과 중국의 추격에 대응하고 신흥국 중산층 소비시장을 선점하려는 의도다. 독일 기업의 47%가 이 ‘똑똑한 제조업’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독일과 함께 ‘제조업 양강(兩强) 체제’를 구축한 일본도 2013년 6월 산업재흥플랜을 수립하고 제조업 체질 개선에 나섰다.
미국은 디지털 제조 및 설계, 경금속 소재, 차세대 파워일렉트로닉스 등의 첨단 제조업 육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으로 ‘연구개발(R&D)-생산-소비’의 선순환이 끊겼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기술과 사업화 사이의 간극을 뜻하는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 현상도 문제다. 미 정부는 독일의 프라운호퍼연구소와 같은 산학연 연구소 45곳을 만들어 제조업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middle)’ 재건에 나섰다.
○ 한국도 ‘창조 제조업’으로 무장해야
한국 제조업체의 연평균 영업이익률은 2000년대 6.3%에서 2010∼2012년 5.8%로 떨어졌다. 미국 제조업체의 영업이익률은 같은 기간 6.1%에서 7.5%로 높아져 한국을 따라잡았다. 한 금융 공기업 사장은 “영업이익률이 미국보다 낮아졌다는 것은 한국 제조업의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동아일보와 현대경제연구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를 비교한 결과 한국은 2012년 제조업 비중이 31.1%로 OECD 평균(15.6%)보다는 높았지만 1인당 부가가치(7만7000달러)는 평균(8만7000달러) 이하였다. 실속이 작은 ‘양적 성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 종로나 용산 등 도심 상가를 ‘창조 제조업’ 클러스터로 바꿀 수 있는 기폭제인 디지털 제조나 제조자 운동도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서울 세운상가에서 제조자 운동단체인 팹랩서울을 운영하고 있는 고산 타이드인스티튜트 대표는 “3D프린터 등 장비나 기술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며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전문 인력 육성과 민관 협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장균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차세대 제조업을 육성하는 범부처 전략과 R&D 투자,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누구나 공장 창업을 할 수 있는 ‘자가(自家) 생산체계’ 육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해외공장 돌아오니 제조업 부활 자신감” ▼ 美 제조업 유턴운동 주도 모저 대표
해외의 공장을 미국 본토로 옮기는 제조업 유턴 운동을 이끌고 있는 ‘리쇼어링 이니셔티브’의 헤리 모저 대표(69·사진)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전, 수송기계, 컴퓨터 등 몇몇 업종에서는 ‘유턴 현상’이 변곡점을 넘었다”고 말했다. 수십 년간 제조업 현장에 몸담았던 그는 2010년 기계제조업체인 GF아지샤밀 명예회장에서 물러난 뒤 이 조직을 만들었다.
―최근 미국 기업들의 유턴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는데….
“2010년을 전후해 중소, 중견기업들로부터 시작해서 최근에는 제너럴일렉트릭(GE) 월풀 애플 구글 등 글로벌 대기업들까지 가세했다. 150개가 넘는 미 기업이 돌아왔다.”
―이유는 뭔가.
“수십 년간 미 제조업체는 낮은 인건비만 보고 해외로 공장을 옮겼다. 10년 전 미국에서의 제조비용은 중국보다 40% 높았다. 지금도 20% 정도 높다. 하지만 해외생산 제품의 운송비용, 현지에서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지적재산권 침해, 지지부진한 공정혁신 등 전체 비용을 따져보니 해외공장 운영이 결코 이득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2012년 2월 중국의 일부 생산라인을 켄터키 주로 옮긴 GE의 제프리 이멀트 최고경영자(CEO)는 ‘해외로 공장을 옮긴 뒤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인건비 격차도 줄고 있다는데….
“2008년 이후 달러화 기준으로 중국의 순노동비용은 매년 10% 올랐지만 미국의 순노동비용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세계적 컨설팅회사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내년에는 양국의 순노동비용 격차가 거의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공장의 미국 복귀로 미국 경제는 어떤 이득을 보나.
“가장 큰 건 역시 일자리 창출이다. 2010년 이후 미 제조업에서 약 50만 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졌는데 이 중 15%인 8만여 개가 본토로 공장을 옮긴 기업에서 만들어졌다. ‘미 제조업의 부활’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소득이다.”
<글 싣는 순서>
<1회> 포스트 뉴 노멀 시대가 온다 <3회> 브레이크 걸린
신흥국, 기회는 있다 <4회> ‘화이트칼라’에서 ‘레인보 칼라’로 <5회> 일하는 노년이 성장동력
<특별취재팀>
팀장=박용 경제부 차장 이상훈 문병기 정임수 기자 (경제부) 박현진 뉴욕 이헌진 베이징
박형준 도쿄 특파원(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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