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처음에 누가, 왜 그랬는지는 기억조차 안 난다. 부모님 일로 전학을 갔고, 그 얼마 뒤 시작됐단 것만 어렴풋이 떠오른다. 심하게 맞진 않았다. 그냥 아이들은 “왜 사냐”며 빈정거렸다. 처음엔 내가 새로 전학을 와서 그런 건가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그 몇몇은 우리 반 아이들로, 반 아이들은 전교생이 됐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이렇게 불렸다. ‘찐따’라고.
중학교 1학년. 일부러 집에서 멀리 떨어진 여자중학교에 지원했다.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기 싫어서. 그런데 미선이(가명)가 이 학교에 왔다. 초등학교 동창 중 한 명. 미선이가 몇몇 친구에게 나를 가리키며 쑥덕거리는 모습을 봤다.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달도 되지 않아 내겐 ‘초등학교 때 왕따’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이유 없는 괴롭힘은 같았지만 ‘나쁜 말’ 수위는 훨씬 잔인해졌다. 이름이 없어지고 이렇게 불렸다. ‘더러운 년’ ‘창녀’ ‘걸레’라고.
중학교 2학년. 시도 때도 없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아이들 입을 보기 무서웠다. 그들은 미술 시간에 내가 그린 그림을 찢으며 욕을 했다. 시험 기간엔 내 책상에 빨간 글씨가 쓰여 있었다. ‘죽어라’라는. 스마트폰을 쓰고 나선 집에서도 무서웠다. 페이스북과 단체 카카오톡 등을 통해 집단 공격이 시작됐다. ○ 여학생 나쁜 말… 길어지고 잔인하고 독해져
현재 중학교 3학년인 서영이(가명·16) 얘기다. 이미 5년째 따돌림에 시달리는 서영이에게 물었다. 뭐가 가장 힘든지. 집단구타? 아니었다. 이렇게 오래 괴롭힘을 당했지만 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조차 아직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또 ‘구타’보다 ‘말’이 더 무섭다고 했다. 특히 자신의 마음을 왜곡하는 말이 심한 욕설보다 아프다고 했다. “가만히 있어도 아이들은 저를 ‘관심종자’(관심을 받기 위해 안달 난 사람을 표현하는 은어)라 불러요. 이 말을 들으면 누가 내 가슴을 쥐어짜는 것같이 아파요.”
여학생들의 나쁜 말이 위험한 수준이다. 특히 초등학생 및 중학생 수준 여학생들의 언어폭력은 방치해선 안 될 지점에까지 이르렀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취재진은 1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일대에서 남녀 중학생을 30명씩 만나 물어봤다. ‘성적으로 비하하는 말이나 욕설을 자주 하느냐’고 물었더니 여학생이 21명(70%)으로 11명(37%)인 남학생보다 월등히 많았다. 김경민 군(15)은 “여자애들의 말 가운데 절반은 욕설”이라며 “게다가 한번 말싸움이 붙으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따져서 남자들이 절대 못 이긴다”고 했다.
가해 여학생들의 언어폭력이 길어지고 잔인하고 독해지면서 당하는 피해 여학생들의 아픔 역시 커졌다. 교육부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2차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학생 가운데 ‘힘들었다’고 답한 비율은 여학생(81.4%)이 남학생(65%)보다 크게 높았다.
실제 취재진의 조사에서도 여중생 28명(93%)이 심한 욕설을 들으면 그날 밤에도 생각날 것 같다고 했다. 남학생은 19명(63%). ○ 성적인 욕설은 구타보다 더 폭력적
여학생들의 언어폭력은 대체로 다수가 개인에게 집단 공격을 가한다는 점에서 더 무섭다.
2012년 8월 서울 송파구에 사는 강모 양(16)은 아파트 11층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강 양이 삶을 포기한 이유는 언어폭력. 가족에 따르면 약 두 달 전부터 친구 16명으로부터 집단 언어폭력을 당했다. 강 양의 아버지는 “오전 1시에도 친구들이 그룹 채팅방에 우리 딸을 초대해 1분에 50여 건의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면서 흐느꼈다.
특히 인터넷과 스마트폰 보급이 확산되면서 애플리케이션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이용한 ‘사이버 왕따’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집단 언어폭력이 더 정교해졌다는 의미다. 여중생 이모 양(13)은 “여자애들은 스마트폰을 끼고 산다. 그러다 보니 단톡(단체 카톡)방에서 누구 하나를 타깃으로 정해 밤낮 가리지 않고 말로 ‘조지는’ 게 하나의 문화가 됐다”고 했다.
2007년 ‘교육심리연구’에 수록된 ‘학교폭력의 발생 과정에 대한 남녀 차이 분석’ 논문에 따르면 2006년 한 해 동안 서울시내 학교폭력 전문 상담기관 두 곳의 전화 및 사이버 상담사례 473건을 분석한 결과 여학생의 경우 언어폭력의 이유로 우정 관계 단절을 가장 많이 꼽았다. 송현주 연세대 교수(심리학과)는 “많은 남학생은 장난스럽게 언어폭력을 시작한다. 이와 달리 여학생들은 관계 단절로 인한 험담이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고 이 경우 복잡한 감정까지 얽혀 상대적으로 수위가 높은 성적인 욕설 등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성적인 욕설에 노출된 여학생은 치명적인 상처를 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이재헌 강북삼성병원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사춘기 전후 여학생들에게 성은 가장 비밀스러운 키워드”라며 “이에 대한 모욕은 남학생 사이 심한 구타의 수준을 뛰어넘는 폭력성을 가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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