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해도 책임 안 묻는다” 단협에 ‘대못’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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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이대로는 안된다/2부 개혁 가로막는 ‘3대 암’]
<1>슈퍼甲 노조의 경영

“노조의 힘이 워낙 세서 기관의 덩치를 줄이는 개혁을 해도 금방 원래 크기로 돌아갑니다.” 기획재정부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대학 교수는 공공기관에 대한 인적 구조조정이 쉽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말 인력 감축을 뼈대로 하는 ‘공공기관 선진화 계획’을 발표하며 25만 명이 넘던 공공기관 인력을 이듬해인 2009년 말 23만4000명으로 줄였다. 하지만 3년이 지난 2012년 공기업 정원은 다시 25만4000명으로 원상 복구됐다.

독과점적 지위를 누려 온 공공기관들은 사업을 축소해야 하는 시점이 돼도 노조에 밀려 인력 구조조정에 실패하고 되레 신규 사업을 더 늘리는 방식으로 기관의 규모를 키워 왔다.

이처럼 공공기관 개혁이 어려운 이유는 노사 단체협상이 경쟁 체제 도입이나 구조 개편을 가로막는, 민간 기업에선 찾아보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사 및 경영권과 관련된 내용까지 단협에 포함시키고 ‘낙하산 사장’을 포함한 경영진은 이를 묵인하는 구조가 수십 년 동안 유지되면서 개혁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 10년 이상 묵은 경영권 침해 조항

40여 개 공공기관이 ‘경영권 간섭에 해당하는 단협 조항을 갖고 있다’고 기획재정부에 보고한 내용을 뜯어보면 과거 개정을 추진했지만 노조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한 항목이 적지 않다.

일례로 한국광해관리공단 노사는 “경영상 해고 사유가 발생하면 해고 범위와 위로금을 노조와 사전 합의해야 한다”고 2000년 합의했다. 고용노동부 당국자는 “사측 권한인 경영상 해고와 관련해 ‘협의’보다 강도가 높은 ‘합의’를 하도록 명시한 것은 경영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광해관리공단 노무 관계자는 “수차례 노조에 개정을 요청했지만 노조가 거부해 14년 동안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인천 송도지역에 냉난방을 공급하는 인천종합에너지는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들에게 사후 불이익을 줄 수 없다고 단협에 명시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기관 출범 시 다른 공공기관의 단협을 참고해 만들다 보니 이런 ‘독소 조항’까지 포함됐다”며 “합법 파업뿐 아니라 불법적인 파업에도 면책특권을 줄 수 있는 소지가 있어 개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영상 독소 조항이라는 판단이 서도 개정하기 힘든 것은 회사와 노조가 합의해야 하는 단협의 특성 때문이다. 김태기 단국대 교수(경제학)는 “단협은 통상 2년의 유효기간을 갖고 체결하는데 그동안 법에 준해 보호를 받게 된다”며 “불합리한 조항을 개정하려고 해도 노조가 반대하면 개정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 독소 조항 묵인한 공공기관

전문가들은 이 같은 경영권 침해 조항이 유지되는 이면에는 회사 측의 ‘묵인’이 있다고 본다. 한국기계연구원 원자력연구원 천문연구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등 12개 공공기관은 2008년 전국과학기술연구전문노조와 “어떠한 명목과 이유로도 임금을 종전보다 저하시킬 수 없다”는 공동 단협 조항에 서명했다. 기획재정부가 ‘경영권 침해’ 단협 조항을 신고하라고 요구하자 이들 12개 기관 중 중 유일하게 한국지질자원연구원만 신고했다. 단협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한 연구원 측은 “문제가 있는 조항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공공기관 관계자들은 이번에 드러난 경영 침해 사례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말 22일간 진행된 철도 파업 당시 비판의 대상이 된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의 ‘자동 승진’과 ‘강제 전보 제한’ 등 치명적인 경영권 침해 사항도 파업 전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철도 업계 관계자는 “코레일이 해당 내용을 슬그머니 단협에 포함시킨 이후 철도노조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며 “코레일 내에서 ‘본부 외 모든 인사는 사장이 아닌 노조가 결정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한 전직 공기업 사장은 “경영진으로선 출근 첫날부터 노조의 반대 집회 등에 시달리다 보면 적당하게 타협하고 싶어진다”며 “한번 타협하면 인사와 투자, 조직 관리 등에서 노조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귀띔했다.

세종=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공공기관#개혁#노조#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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