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원수에서 이웃으로… 갈등 탈출 비결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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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간소음, 댁은 어떻습니까?]

‘유산기가 있으니 제발 좀 조용히 해 주세요.’

윗집에 이런 거짓말이라도 하면 좀 나아지려나. 이웃 아줌마들 말마따나 말이다. 아니야, 관두자. 그 사람들 어차피 마주칠 텐데 나 임신 안 한 거 알아보겠지.

경기 화성시 향남주공아파트 5단지 1층에 사는 주부 김모 씨(33·여)에겐 이런 생각을 하며 윗집에 대한 불만을 누르며 살던 나날이 있었다. 2층에서 나는 ‘쿵쿵’ 소리는 오후 8시가 지나면 ‘마성’을 드러냈다. 그 시간은 김 씨의 일곱 살 아들이 잠드는 때였다. 아들을 깨우지 않으려 고요히 있다 보면 위층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애가 거실에서 부엌으로 쪼르르 달리네… 얼씨구 이젠 안방으로?’ 김 씨는 소리만으로 윗집 아이의 동선을 상상했다. ‘누구는 애 안 키워 봤나….’ 이가 갈렸다.

김 씨도 한때 층간소음 가해자였다. 아파트 5층인 친정에 아들을 데리고 가면 아래층 신혼부부가 “시끄럽다”며 올라와 친정아버지와 얼굴을 붉히곤 했다. 김 씨가 3년 전 지금의 1층으로 이사 온 건 층간소음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김 씨는 자신도 한때 가해자이던 시절을 떠올리며 윗집 소음을 1년가량 참았지만 한계가 왔다. 김 씨는 일단 경비원에게 2층에 대신 항의해 달라고 했다.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김 씨는 경비실에 찾아가 항의를 제대로 전달하는지 통화 내용을 직접 확인했다.

“그 집에 혹시 아이가 뜁니까?”(경비원)

“안 뛰는데요.”(2층 집)

집에서 쿵쾅거리는 소리에 1시간 넘게 시달리다 2층 집에 불이 켜진 것을 확인하고 경비실로 달려간 김 씨로선 괘씸한 반응이었다. 김 씨는 2층 집에 직접 인터폰으로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얼마 뒤 다른 이웃을 통해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내 2층 집과 겨우 연락이 닿았다.

“저희 집은 조용한 집인데요.”(2층 집)

김 씨는 결국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운영하는 층간소음 관리위원회에 도움을 청했다. 좀처럼 인터폰을 받지 않던 2층집 주인 이모 씨도 더는 어쩔 수 없었다. 인터폰 화면에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 서너 명이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리소장, 퇴직 교장 등 층간소음 관리위원들이었다. 문이 열리자 위원들은 굳은 얼굴로 현관에 서 있는 이 씨에게 안부부터 물었다.

“요즘 층간소음으로 많이들 힘들어하던데 괜찮으세요?”

‘아래층의 메신저’를 자임하며 윗집을 가해자로 몰아갔다간 되레 갈등을 악화시킬 수 있었다. 이 씨는 “저희 집도 위층에서 많이 뛰는데 그냥 참아요. 올라가 봐야 싸움밖에 더 합니까”라고 했다.

이 씨의 집 거실에는 두께가 5cm쯤 되는 매트가 넓게 깔려 있었다. 그 위에 두툼한 이불까지 깔아 걸으면 푹푹 파였다. 24개월 된 딸이 자주 뛰어다녀 이 씨가 취한 조치였다. 위원들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밑에 1층에서 아이 뛰는 소리 때문에 힘들다고 하던데….” 이웃 원로들이 전하는 말이라 이 씨는 흘려들을 수 없었다.

며칠 뒤 이 씨는 1층으로 걸어 내려오다 문을 열고 나오던 김 씨와 마주쳤다.

“저희 집이 좀 시끄럽나요?”

“저희 애가 저녁 8시면 자요. 그 후론 조용히 해 주시면 좋겠어요.”

2년 넘게 한 층을 사이에 두고 지낸 이웃의 첫 대화였다. 김 씨는 그동안 ‘2층 집 어디 만나기만 해 봐라’ 하고 별러 왔었다. 하지만 관리소장에게서 “2층에 가 보니 매트에 이불까지 깔고 살더라”라는 말을 전해 들은 뒤라 화가 누그러져 있었다. 윗집 이 씨는 아랫집 아이가 오후 8시에 잠든다는 말이 귀에 박혔다. 이 씨 역시 잠든 딸이 깨지 않게 안간힘을 쓰는 보통 부모였다.

얼굴을 몰라 스쳐 지나는 사이던 두 가족은 안면을 튼 이후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김 씨는 자연스레 윗집 아기의 얼굴과 이름을 알게 됐다. ‘윗집 사람’이란 호칭은 ‘OO이 아빠’ ‘OO이 엄마’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윗집 소음은 크게 줄지 않았다. 김 씨는 이 씨를 만날 때마다 ‘좀 더 조용히 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씨는 “신경 쓸게요”라며 웃어넘겼다.

밤에 쿵쾅거리는 소음의 강도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소음 시간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2시간 넘게 이어지던 소리가 30분으로 줄었다. 윗집 아이가 뛰면 부모가 자제시킨다는 의미였다. 김 씨는 윗집 소음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기가 신났나 보다’ ‘지치면 그만하겠지’ 하고 생각해요. 아이가 예쁘고 이름도 아니까 친구 아이가 뛰노는 것 같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소리가 작게 들려요.”

김 씨와 이 씨 가족의 갈등 탈출기에는 여러 시사점이 있다. 우선 갈등이 6개월 넘게 지속돼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경우는 이웃사이센터나 아파트 층간소음위원회 등 제3자를 경유하는 게 좋다. 감정이 격앙된 채 대면했다간 가벼운 말실수로도 상대를 자극하게 된다.

갈등의 실마리는 서로의 특수한 상황을 알게 될 때 풀린다. 김 씨는 윗집이 매트 위에 두꺼운 이불을 깔고 지내는 등 소음을 줄이려 노력한다는 점을, 이 씨는 아랫집 자녀가 오후 8시에 잠을 잔다는 점을 알고 나서 적대감이 약해졌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서로 사정을 이해하면 소리에 대한 긴장도가 떨어져 같은 소리도 전보다 작게 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웃 간에 소음이 나는 시간을 조율해 소음의 시작과 끝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하면 듣는 사람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층간소음이 ‘고문’이 되는 건 불쑥 찾아오고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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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심한 가정에선 공식 소음 피해 기준을 초과하는지 확인해 보자며 이웃사이센터나 주거문화개선연구소 등 중재기구에 소음 측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음 측정은 갈등을 오히려 부추길 소지가 크다.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가 소음 피해로 인정하는 기준은 1분간 평균소음이 낮에 40dB(데시벨), 밤에 35dB이 넘을 때다. 이 기준은 사람 귀에 들리는 소리만 측정한 것으로 청각뿐 아니라 촉감으로 진동이 전달되는 층간소음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실제 측정을 하면 대부분 기준치를 밑돈다. 이를 두고 가해자는 “그쪽이 예민하다”며 기세등등해 하고, 피해자는 “조사 결과를 못 믿겠다”고 반발하는 경향을 보인다. 서로 사정을 들여다보는 것 외에는 해법이 없는 것이다.

신광영 neo@donga.com·손효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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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주신 분들=차상곤 주거문화개선연구소 소장, 정을규 한국환경공단 층간소음 이웃사이센터 차장, 배명진 숭실대 소리공학연구소 소장,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 변창흠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세종대 교수), 손세관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이강원 경실련 갈등해소센터 소장,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하지현 건국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
#층간소음#소음#이웃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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