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갈등이 극한에 이른 이웃들은 대부분 관계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다. 서로 다른 감정상태라는 점을 몰라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아랫집은 상당 기간 소음에 시달리며 항의할지 말지 고민하다 못 참겠다 싶을 때 윗집 초인종을 누른다. 반면 윗집으로선 난데없는 항의 방문이다. 윗집은 대체로 스스로를 ‘조용한 집’으로 여긴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쪽은 만성화된 문제를 제기하는데 상대는 급성으로 받아들이는 탓에 역지사지가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아슬아슬한 첫 대면에 불꽃이 튀는 건 윗집이 소음 자체를 부인할 때다. 윗집은 아랫집 사람이 올라오기 직전 상황만 떠올리지만 아랫집은 그동안의 소음 피해를 모두 염두에 둔다. 온도차가 생기는 이유다. 서울 송파구 가락동 연립주택에 사는 주부 정모 씨(43·여)는 “딸이 고3이라 조용히 해달라고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윗집에서 ‘저흰 집에서 발꿈치 들고 다녀서 아킬레스건이 아파요’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 한번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윗집으로선 선뜻 잘못했다고 하기가 쉽지 않다. 차상곤 주거문화개선연구소 소장은 “서로 정보가 없고 단절된 상태에서 불쑥 ‘조용히 살라’는 지적을 받으면 방어본능이 작동한다”고 말했다. 항의 시간이 심야 또는 이른 아침일 경우 ‘사생활 침해’라는 반감은 더욱 강하게 든다.
첫 대화에서 서로 감정이 상하면 말문이 닫힌다. 윗집은 아랫집으로부터 언제 어떻게 시끄러운지 설명을 듣지 못한 경우가 많아 어떻게 조용히 해야 할지 잘 모른다. 이런 가운데 소음이 계속되면 아랫집은 무시당했다고 오해하기 쉽다. 소음이 의도적이라고 느낄 때 분노는 배가 된다.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만원 지하철에서 발을 밟히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화가 덜 나지만 상대가 일부러 괴롭힌다고 생각하면 공격성이 생긴다”고 말했다.
윗집 사정을 알 기회가 없었던 아랫집은 상상의 날개를 편다. 아이가 매트도 안 깐 바닥을 놀이터처럼 뛰어다니도록 부모가 방치한다거나 한밤에 트레드밀(런닝머신)을 뛰는 등 몰지각한 짓을 한다고 추측한다. 상대가 가내수공업으로 귀금속 세공을 하며 소음이 심한 장비를 쓰고 있다는 등의 착각에 빠지는 사례도 있다. 한국환경공단 ‘층간소음 이웃사이센터’ 관계자는 “가내수공업 소음에 시달린다는 민원들을 확인해 보면 거의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윗집은 갈등이 길어지면 아랫집이 과민반응을 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나름대고 소음저감 노력을 해도 항의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때 아랫집은 실제 고통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번 소음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소리에 예민해지는 ‘칵테일파티 효과’ 때문이다. 한 번 소음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소리에 특히 예민해지는 ‘칵테일파티 효과’ 때문이다. 시끄러운 장소에서도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부르거나 자신이 관심 갖는 이야기를 할 때 그 부분만 선택적으로 잘 듣게 되는 현상이다. 윗집에서 나는 특정 소음에 오래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이다.
사람마다 불편을 느끼는 소음의 종류와 세기도 다르다. 신윤미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개인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음역에 차이가 있다.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소리는 크지 않아도 갑자기 ‘꽝’하거나 발로 ‘쿵쿵’ 하는 소리에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소음 피해는 주관적이어서 섣불리 피해정도를 재단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층간소음 갈등이 장기화되면 소음 자체보다 악감정과 불신의 문제로 본말이 전도된다. 아랫집에 직장인이 살 경우 ‘소음 피해→불면증→출근 후 히스테리→나빠진 평판에 또 스트레스→귀가 후 소음에 더 민감→불면증 심화’ 같은 악순환을 겪는다. 층간소음으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으면 다른 원인으로 생긴 문제까지도 이웃 탓을 하는 사례까지 생긴다. 인천 계양구의 윤모 씨(46)는 “층간소음으로 한참 골치 아플 때 회사가 부도나고 아들도 외국어고 입시에 떨어졌는데 이게 다 윗집 때문인 것 같았다. 칼부림까지 하는 심정이 이해가 됐다”고 털어놨다. 유은정 정신과 전문의는 “소음에 오래 시달리면 피해의식이 생기고 충동 조절이 안 돼 다른 이유로 화풀이 대상이 필요할 때 갈등을 빚던 이웃을 향해 우발적으로 폭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단계에서 윗집은 대체로 아랫집을 외면한다. 마주쳐봐야 싸움만 날 거라고 생각해 인터폰이 오거나 초인종이 울려도 응하지 않는다. 물리적인 위협을 느껴 피하는 사례도 많다. 하지만 피할수록 불신은 커진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 R아파트에 사는 박모 씨(38·여)는 “뻔히 베란다로 불 켜진 거 확인하고 갔는데 아무도 없는 척하면 ‘정말 못 믿을 사람들이구나’ ‘자기 집 애들 안 뛴다는 거 역시 거짓말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아랫집에선 윗집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리거나 ‘보복 소음’을 내기도 하다. ‘선풍기 날개에 나무 빗자루나 추를 연결해 천장을 ‘자동 타격’하거나 화장실에 우퍼 스피커를 설치한 뒤 헤비메탈 음악을 올려 보내는 수법이 자주 쓰인다. ‘맞불 공격’은 엉뚱한 데까지 소음 피해를 준다. 스스로를 이웃들로부터 고립시키는 자충수다.
오랜 갈등을 겪고 나면 상대가 이사를 가도 후유증이 남는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H아파트에 사는 윤모 씨는 “지난달 윗집이 이사를 가고 나선 그 윗집의 옆집(대각선 집) 소음에 시달린다”고 토로했다. 윤 씨는 “윗집 뛰는 소리에 2년 넘게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이젠 조그만 발자국 소리에도 귀가 쫑긋 선다. 소리 자체에 예민한 사람이 돼버려 집에 오는 게 고통이고 주말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아랫집의 항의를 받아온 윗집 역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겪는다. 인터폰만 울리면 아랫집인 줄 알고 자녀들이 벌벌 떨거나 서로 ‘조용히 하라’고 하도 다그쳐 가족 간 대화가 사라진다. 소리를 안 내려 조마조마해하다 보면 자기도 민감해져 윗집 소음에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웃의 해코지가 두려워 집 앞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한 사례도 많다. 이웃 간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집은 감옥이 된다. :: 칵테일파티 효과 ::
칵테일파티처럼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시끄러운 장소에서도 자신의 이름이나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유난히 잘 들리는 현상. 의사가 일반인보다 청진기를 통해 나는 소리를 잘 듣는 것도 이 효과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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