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에 마련된 전시관 입구로 들어서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다룬 만화들이 걸려 있었다. 그 앞에 서면 그 속에 담긴 할머니들의 증언이 육성으로 들리는 듯했다. 만화 속 연약한 소녀들은 일본군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수십 명씩 줄지어 늘어선 일본군을 상대하느라 병들어 갔다.
만화를 지켜보는 외국 관람객들은 안타까움과 충격으로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를 요구하는 ‘수요집회’ 모습을 그린 만화도 걸렸다. 옆에는 일본의 사죄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위안부 할머니의 모습도 나란히 있었다. 그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관람객도 있었다.
2일(현지 시간) 폐막된 세계 최대 만화축제인 프랑스 ‘2014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한국만화기획전 ‘지지 않는 꽃’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주관한 이 기획전엔 이현세 박재동 김광성 백성민 김금숙 등 작가 19명이 만화, 애니메이션 등 25편을 제작해 10대 소녀를 성노예로 삼은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온 할머니들의 한(恨)을 증언했다.
앙굴렘 극장 지하에 마련된 230m²(약 70평) 규모의 전시관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관람객 1만7000여 명이 다녀갔다. 한국과 똑같은 피해를 본 중국, 대만뿐 아니라 일본 ‘망가’를 프랑스에 처음 소개한 도미니크 베레 아카타 출판사 사장 등 해외 유명 출판사 관계자도 방문해 공감과 지지를 표했다.
여성인권운동가인 파브리스 비르질리 프랑스 국립과학원 책임연구원은 “유럽 여성들은 위안부 문제가 현재 진행형인 여성 성폭력 문제임을 분명히 인식할 것이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프랑스 안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보편적 가치인 ‘여성 인권’ 앞에서 세계인이 한목소리를 내자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본의 주장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일본의 일부 기자는 지난달 30일 열린 위안부 기획전 개막 기자회견장에서 “한국의 정치적인 행사는 놔두고 일본만 철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기도 했다. 이에 니콜라 피네 아시아담당 디렉터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알리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알리는 것이 정치적이다”고 일침을 가했다.
기획전에 참가한 김광성 작가는 “진실은 훼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진실에 기반한다면 우리 목소리를 내는 데 더는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위안부 기획전은 앞으로 프랑스 앙굴렘을 벗어나 세계 각지에서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조직위에는 앙굴렘에 참가한 출판사 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당한 중국, 위안부가 설치됐던 싱가포르 등에서 기획전을 유치하고 싶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조직위는 이와 별도로 나치의 학살이 자행된 프랑스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을 사전 답사하고 기획전 전시를 검토 중이다.
한편 기획전 총괄기획을 맡은 김병수 목원대 만화애니메이션과 교수는 “일본은 독도 문제에서도 공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며 “중견 만화가들이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 알렸듯 앞으로는 세계 각지에 팬들이 많은 인기 웹툰 작가들이 독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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