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박권상 前동아일보 논설주간-KBS 사장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5일 03시 00분


1980년 신군부에 ‘無社說’로 저항한 대쪽기자

1972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기자협회가 주최하는 제1회 전국 언론인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동아일보 기자들이 고인을 헹가래 치고 있다. 동아일보DB
1972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기자협회가 주최하는 제1회 전국 언론인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동아일보 기자들이 고인을 헹가래 치고 있다. 동아일보DB
“어느 경우든 사실은 신성하고 의견은 자유라는 철학, 바로 여기에 자유 사회의 힘이 있고 자유 언론의 빛이 있지 않을까.”(1989년 2월 7일 ‘동아시론’)

그는 언론의 힘을 믿었다. 자유롭고 공개된 시장에서 진실과 거짓이 경쟁하면 반드시 진실이 살아남는다는 믿음으로 신성한 사실을 좇는 기자로서, 시대를 통찰하는 글로 독자를 일깨우는 지식인으로서 평생을 살았다.

4일 별세한 언론인 박권상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3세의 나이로 합동통신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962년 동아일보로 옮겨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지냈고 1973년부터 3년간 영국 특파원으로 활동했는데 당시 언론 선진국에서 목격한 자유로운 신문과 공영방송 BBC는 언론인으로서 그의 삶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전기가 된다.

자유로운 언론에 대한 믿음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으로 엄혹한 시험대에 놓였다. 동아일보 논설주간이던 그는 신군부의 검열에 5월 16일부터 5일간 사설을 게재하지 않는 ‘무사설(無社說) 저항’으로 맞섰다.

그해 7월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 발표됐고 모든 신문이 김 씨를 죄인으로 단죄했다. 동아일보도 신군부의 압박을 받았다. 고인은 “10년 후 독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며 버티다 결국 “공정한 재판으로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사설을 썼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사설이고, 계엄사는 검열에서 전문을 삭제했다. 동아일보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침묵을 지킨 유일한 신문이 됐고, 고인은 그해 8월 ‘언론대학살’ 때 희생됐다.

훗날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술회했다. “진실을 밝히는 꿋꿋한 언론의 정신, 어떤 형태이든 전체주의를 배격하고 우리 사회를 민주적으로 개혁하려는 의지의 표명,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동기요 사명이었다.”(‘박권상의 시론’·1992년)

언론인으로서 고인의 인생 2막은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KBS 사장에 임명되면서 시작됐다. BBC를 세계 공영방송의 모델로 생각했던 그는 “BBC는 섣부른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며 엄정 중립과 품격 있는 방송을 주문했다. 홍성규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은 “내가 보도국장으로 있는 1년 반 동안 박 사장은 보도와 관련해 한번도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 그것이 늘 감사했다”고 회고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는 노력은 시청자들의 신뢰로 보답받았다. KBS ‘9시 뉴스’가 MBC ‘뉴스데스크’를 제치고 앞서 가기 시작한 것이 박 사장 재임 시절이다. ‘환경스페셜’과 ‘일요스페셜’ 같은 교양 프로그램으로 공영성을 강화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협의를 통해 남북 방송 교류의 물꼬를 텄다.

1980년 고인과 함께 해직됐던 소설가 최일남은 “고인은 언론인으로서 명성을 이용해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음에도 외길만을 걸었다. 언론인에게 모범이 되는 존재”라고 추모했다.

고인의 언론에 대한 믿음은 맹목적이지 않았다. 그는 “언론의 제일 기능은 뉴스를 순결하게 전하는 것”이라며 “광주의 비극이 있은 지 9년간 때 묻지 않은 진실이 전해질 수 없다는 데 또 하나의 비극이 있다”고 했다.

수많은 ‘언론’이 그보다 더 많은 ‘설’들을 쏟아내는 인터넷 시대를 내다본 선견지명이었을까. 언론 외길을 걸어온 고인의 생각은 ‘자유언론의 명제’ ‘영국을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진영 ecolee@donga.com·우정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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