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씨○, 내가 여길 왜 와. 무슨 죄를 졌는데!” 술에 잔뜩 취해 택시 운전사에게 요금을 주지 않겠다고 행패를 부리다 지구대로 끌려온 30대 남성이 10여 분째 소리를 지르고 있다. 입에서 계속 “씨○” “개새○”와 같은 욕이 튀어나온다. 욕이 계속돼 경찰이 수갑을 채우자 더 험한 욕이 나온다. “수갑을 왜 채워! 이거 풀어! 풀기만 하면 칼로 배를 쑤실 거니까….”(지난달 25일, 서울 영등포경찰서 당산파출소)
#2. “어이 이리 와 봐. 왜 수갑 채우는 거야. 법적으로 맞게 이러는 거야, 이거? 인터넷에 올려야지, 이거 원. 어이구. 놀고들 있네, 씨○. 용돈이나 받으려고 그러는 거지. 야, 소장 왜 수갑을 채우는지 말해 봐.” 폭행 혐의의 40대 남성은 쉬지 않고 경찰을 자극한다.(24일 오전 1시 25분경, 서울 마포경찰서 홍익지구대)
#3. “나 잡으려고 아주 지랄을 해요. 이렇게 묶어 놓고. 씨○, 다 잘났지? 이게 무슨 법을 공부한 사람들이야….(감기에 걸려 마스크를 하고 있는 경찰에게) 민간인이 앞에 있는데 검은 마스크 쓰고 얘기해? 아가리가 무슨 덤프트럭이야? 눈 왔어? (추워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경찰에게) 모가지 꺼내세요….” PC방에서 아르바이트생을 폭행한 20대 남성은 밤새 떠들고 있다.(24일 오전 3시 5분경, 서울 광진경찰서 화양지구대)
#4. “국민 세금 먹고 니가 하는 일이 뭐냐?” 구급 소방관들이 술에 취해 넘어진 사람을 응급처치 할 때, 문이 잠겼다며 열어달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을 때 한 번씩은 꼭 듣는 말이다. 처치 속도가 늦어진다 싶으면 “야, 너 일 똑바로 못하냐?”라는 비아냥거리는 말이 귀에 꽂힌다. 반사적으로 쳐다보면 이런 말도 듣는다. “어쩔 거야, 쳐다보면.”(서울 구로소방서 오쾌봉 소방장) ○ 매일 밤, 대한민국은 ‘욕설 공화국’
날이 어두워지고, 술집에 하나둘 불이 켜지면 긴장하는 곳들이 있다. 전국의 파출소와 지구대, 그리고 소방서. 술에 취해 싸우거나 다친 사람들은 경찰이나 구급 소방관들에게 고성과 함께 각종 욕설을 퍼붓는다.
취재진은 경찰과 소방관 각 10명에게 △하루에 욕설 등 폭언을 듣는 횟수와 △어떤 욕을 듣는지 물어봤다. 응답자 전원이 “하루 한 번 이상 욕설을 듣는다”고 했다. 평균 2회 정도 욕설을 듣는 것으로 나왔다. 서울 강남의 한 지구대 경찰은 “지금은 겨울이라 적은 편”이라고 했다. 겨울에는 날씨가 추워 술을 마시는 사람이 여름보다 적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들을 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서울 영등포중앙지구대 김동국 순경은 휴대전화 영상을 하나 보여줬다. 술에 취해 싸우다 주민의 신고로 입건된 남성이 지구대 안에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며 서 있었다. 중간에 하얀 물체가 날아가는 것도 보인다. 경찰에게 침을 뱉은 거다.
경찰과 소방관이 자신에게 대응해 욕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더 의기양양해진다. “니네 엄마 죽여버린다” “니 모가지를 잘라버릴 거다”란 말이 서슴없이 나온다. 여성 경찰이나 소방관의 경우 성희롱에도 노출돼 있다. 영등포소방서 박주영 소방사는 “술에 취한 사람들이 은근슬쩍 여성 소방관의 몸을 만지는 경우가 있다”며 “눈치챈 남자 소방관이 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얌전해진다”고 답답해했다.
○ 욕에도 ‘레퍼토리’가 있다
“씨○” “개새○”. 경찰과 소방관들이 가장 많이 듣는 욕이다. 그 외 욕설 중 독특한 레퍼토리가 있다. 신정 119안전센터 양종삼 소방사는 “‘너 나이가 몇 살이냐. 공무원이 이래도 되냐. 세금 받아먹는 너네들이…’란 말이 시작되면 끝이 없다”고 설명했다. 경찰들이 많이 듣는 폭언 중엔 “짭새(경찰을 비하하는 속어)” “세금으로 먹고사는 주제에” “니네가 언제부터 권력이라고” “국민을 건드려?”와 같은 얘기가 유독 많다.
이는 기존에 갖고 있는 ‘제복’의 권위적인 이미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방증이다. 한 경찰은 “과거 군사독재 정권 때 고문하거나 강압적으로 수사했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현택수 한국사회문제연구소장은 “정부나 권력에 대한 불만이 일선 지구대나 파출소 경찰들에게 터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평소 차별받는다고 느끼거나 ‘권력 있는 자만 편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가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공무원인 경찰이나 소방관에게 화풀이를 한다는 것이다.
○ 마음 닫는 ‘민생 지킴이’
“마치 ‘고용주’가 하인 부리듯 하는 게 가장 속상합니다. 세금을 냈으니 부려 먹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구로소방서 오쾌봉 소방장은 “자꾸 욕설을 듣거나 하대를 받다 보면 구급대원들이 소극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민을 위해 일한다는 마음으로 출동했는데 욕을 먹게 되면 경직돼 적극적으로 업무를 할 수 없다는 것. 한 소방관은 “솔직히 만나는 시민들 눈치를 많이 본다.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푼다는 느낌도 자주 받는다”고 털어놨다.
경찰들도 술에 취한 사람을 대할 땐 반사적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촬영부터 한다. 한 경찰은 “술에 취해 남의 가게를 부순다는 신고를 받고 가선 먼저 현장을 찍는다”고 말했다. 난동을 제지하고 나면 나중에 “경찰에게 맞았다”고 우기거나 “내가 부수지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하는 사례가 많아서다.
언어폭력으로 받는 경찰의 스트레스는 심각하다. 2012년 경찰청 자체 조사에 따르면 ‘시민으로부터의 개인적인 모욕’은 지구대·파출소에 근무하는 경찰관의 스트레스 요인 중 가장 영향이 큰 것 중 하나로 꼽혔다. 시민의 모욕은 ‘강력범과의 대처’ ‘범인으로부터의 불시의 공격’ ‘현장에서 즉시 해야 하는 중요한 결정’ ‘승진 경쟁’ ‘까다로운 업무 할당’보다도 경찰관에게 심리적인 압박과 충격을 많이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트레스 항목 47개 중 최상위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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